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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시간, 지옥에서 건져 올린 세 개의 이름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6-29 19:06:30
  • 수정 2025-08-05 04:14:45

  • 1995년 여름 훈련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생환 소식

<사진 = 붕괴사고 전 삼풍백화점 전경>


콘크리트 지옥에서 온 편지


1995년 7월, 훈련소. 군대는 시간을 다르게 재단하는 곳이다. 아침 기상나팔부터 저녁 취침점호까지, 모든 순간이 예정된 대로 흘러간다. 6주동안 철저히 외부소식이 차단된 훈련소. 그런데 어느날 아침, 연병장에 모인 6백여 명의 훈련병들 앞에서 중대장이 전한 소식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두 번이나 그런 일이 더 있었다.


"삼풍백화점에서 생존자가 발견되었다."


몇 주 전 붕괴된 그 건물에서 아직도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6월 29일 오후 5시 52분, 20초 만에 무너져 내린 그곳에서 말이다. 중대장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마치 기적을 전하는 사람의 어조였다.


최명석이 처음이었다. 스무 살, 지하 1층 신발 매장 아르바이트생. 230시간 동안 60센티미터 높이의 틈새에서 버텼다. 그가 먹은 것은 포장지를 벗긴 종이상자였다. 마신 것은 천장 틈으로 스며든 빗물이었다. 구조대가 그를 끌어올렸을 때, 그의 첫마디는 "괜찮아요. 물이요, 물"이었다. 


괜찮다고? 17일 동안 콘크리트 관 속에서 종이를 씹어 먹으며 버틴 사람이 괜찮다고 말한다. 훈련소 연병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 다음차례는 유지환이었다. 열여덟 살 소녀가 285시간을 견뎠다. 구조되자마자 한 말이 걸작이었다. "구조대원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어요."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 올린 농담이었다. 웃음마저 눈치보는 훈련병이지만 환호를 터뜨렸다. 누군가 "저게 진짜 정신력이야"라고 중얼거렸다.


마지막은 박승현이었다. 377시간, 무려 17일을 버텼다. 원래 그날은 쉬는 날이었지만 아픈 동료를 대신해서 나왔다. 착한 마음이 부른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착한 마음이 끝내 그를 살려냈으리라. 구조될 때 그의 몸무게는 30킬로그램이나 줄어있었지만, 눈만은 살아있었다.


나는 그해 스물셋이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남들보다 일이년쯤 늦게 입대한 신병이었다. 음악한답시고 기타를 메고 홍대 앞을 떠돌다가 결국 국방의 의무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특히 최명석이란 친구가 맘에 걸렸다. 겨우 세 살 차이 연배였으니. 그가 콘크리트 더미 아래서 종이상자를 뜯어먹고 있을 때, 그 덥던 대구 훈련소에선 탈 난다며 한여름에도 미지근한 물을 제공했고, 6주가 지나면 이가 시리도록 시원한 콜라를 원 없이 마시라 다짐했던 나였는데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스친다. 같은 하늘 아래서 이토록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그들은 편지 없는 우편배달부 같았다. 지옥에서 직접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이었다.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포기하지 마라"는 전갈을.


입대직전에 발생한 사고로 사고 지역 근방에 살던 친구들에게 삐삐로 8282 보채며 무사함을 확인하던 기억도 스쳤다. 하지만 그 세 사람은 17일 동안 완전한 침묵 속에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 속에서도 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삐삐 하나로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던 내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였는지 깨달았다.


3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는 더 많은 참사를 겪었다. 대구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그리고 얼마 전, 무안 공항에서 또다시 비극이 일어났다.

매번 우리는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하지만 참사는 반복되었다. 마치 우리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처럼. 안전불감증이라는 말도 이제 진부해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1995년 여름 삼풍백화점에서 살아 돌아온 세 사람이 보여준 것이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생존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들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종이상자라도 씹어 먹고, 빗물이라도 받아 마시고, 무엇보다 "구조대가 올 것이다"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까까머리 훈련병은 군을 무사히 제대하고 지금 쉰을 넘겼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최명석씨도 이제 중년이 된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었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1995년 여름 훈련소에서 들었던 그 소식만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들에게 늦었지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메시지에 대해. 콘크리트 지옥에서 보낸 편지 없는 편지에 대해.


"살아라. 포기하지 마라. 누군가 너를 찾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메시지는 유효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항상 잊지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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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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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cetaz12025-06-30 14:22:46

    그해 5월 군제대 후 신세계백화점 지하 식품코너에서 알바하던 중 강남에서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선 다들 부랴부랴 밖으로 대피했던 기억이...
    항상 잘 읽고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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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29 22:29:53

    근래 읽은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글입니다. 다시한번 희망을 생각하게 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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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inp72025-06-29 20:35:23

    마음이 뭉클해지는 기사 잘 읽었습니다. 그 당시 구조 현장에 계셨군요. 고생하셨네요. 괴물독재국가가 된 이 상황에선 정치신세계와 팩트파인더 기사를 보는 낙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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