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업무의 성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변호사와 의뢰인과의 법적 관계는 고용이 아닌 위임이다. 고용과 위임의 차이는 손발로 쓰느냐 머리로 쓰는냐에 있다.
고용은 사용자의 물리적 폭을 확장하는 계약이다. 위임은 위임인의 의사결정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약이다. 그래서 위임계약은 주로 전문가를 섭외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는 종종 왜곡된다. 변호사를 선임 하고도 구체적인 업무내용을 일일이 정해주는 의뢰인이 있다. ‘위임’계약을 맺고는 ‘고용’처럼 운영하는 것이다. 의뢰인의 지적 한계를 넘기 위해 높은 비용을 투입 하고도 자신의 한계 내에 전문가를 가두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행태가 좋은 결과를 낼 리 만무하다.
법률문서는 법원이나 수사기관을 향한 설득문서다. 일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 되어야 하는 전문적 서류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는 의뢰인이 있다. 초안을 보내주면 빨간펜으로 첨삭해 자기 생각을 담는다.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과 희망사항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반영할지 여부는 변호사의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법률서면은 의뢰인의 기분을 맞추는 용도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이 해소되지 않으면 나는 미련 없이 사임한다(민법에 의해 위임계약은 언제든 일방이 해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타협하는 변호사들도 있다. 의뢰인이 해달라는 모든 요구를 들어준다. 그것이 소송에서 불리하더라도 그냥 해준다. 소송에 지더라도 의뢰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의뢰인은 이런 변호사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패소 하고도, 열심히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 한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비난을 피하고 돈도 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좋으니 그만이다. 위임계약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한정된 시간을 의뢰인의 심기보호와 궁금증 해결에 소모해 사건 자체에 소홀해 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의무위반이 아닌가? 수임인은 위임인의 눈치를 보면 안 된다. 수임목적에 반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본질이 지켜지지 않으면 단호히 그 자리를 내려 놓아서라도 위임인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의뢰인의 심기를 상하게 하더라도 일에 되게 하는 것이 전문가의 자세라 생각한다.
하물며 일개 변호사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무려 국가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작금의 권력자들의 인식은 개탄스럽기 그지 없다. 삼권분립을 무색하게 만드는 정부와 여당의 독단적 행태가 가관이다.
이들의 문제는 2가지다.
자신들의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받았다고 정당화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강성 지지자들만 자신들의 위임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여러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받은 변호사가 특정 의뢰인에게 편파적인 입장을 갖는 것과 같다.
두번째 문제는 강성지지층의 심기보호가 사실상 국정운영의 지향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일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기반의 요구를 받아 주면서 전체 국민을 위한 것처럼 포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 권력의 평온이라는 열매를 취한다. 그 피해는 국민이 본다. 여기서 국민에는 그들의 강성지지층도 포함된다. 국가가 있어야 정치가 있다. 국가야 어떻게 되든 강성지지층 심기를 살피다 보면 그 강성지지층도 결국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샤를 드골(1890 ~ 1970)은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손꼽힌다. 프랑스 최대 공항과 항공모함에 그의 이름이 쓰일 정도다. 물론 그에 대해서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이를 희석하고 극복할 만한 여러 특징적인 행보를 보여 주었다.
1950년대 후반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알제리의 독립 전쟁이 격화 되자 프랑스 사회의 여론은 알제리 독립 찬성과 반대로 양분 되었다. 드골은 자국의 식민주의를 당연하게 여겼고 그의 지지세력도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는 강경극우파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국민투표(독립반대 명분을 위한 것이었다)로 나온 여론은 알제리 독립이 다수였다. 이 상황에서 드골은 자신의 기존입장을 바꾸어 알제리를 포기하는 결정을 했다. 문제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강경 극우파였다. 드골은 이들에게 알제리를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국익에 도움되는 일임을 설득해 갔다. 이 과정에서 암살위협에 시달리고 군부 쿠데타 시도까지 겪었지만 결국 자신의 지지기반을 설득해 낸다. 이로써 프랑스는 소모적인 독립전쟁에서 벗어나 정국불안정을 해소하는 발판을 마련 했다. 국익을 위한 선택을 하고 그로인해 감당해야 할 지지기반의 반발을 감당하고 극복한 사례다. 그를 단순히 권위주의자라고 치부할 수 없는 여러 사례 중 하나다.
이미지 생성 - 가피우스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출세를 향한 정치인들의 각개전투장으로 변질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외교와 경제, 심지어 사법에도 국익을 고려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개딸’들의 성화에 장기판 말처럼 활보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그 대가로 보호막 없이 광야에 내던져진 국민들의 처량한 신세가 눈에 밟힌다. 지금은 자신들의 세상이 온 것 같겠지만, 국가가 동력을 잃으면 그 활보할 무대도 없어지는 것이다.
리더라면 그 자리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위임한 자의 심기를 상하게 하더라도 위임 받은 일의 목적을 달성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위임인을 위한 것이다. 위임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서라면 위임인을 설득하고 혼내기도 해야한다. 위임인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요구 받는다면 그 자리를 내려 놓아서라도 위임인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은 권력을 위임 받은 것이지 국민에게 고용된 것이 아니다. 리더는 국민의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길을 제시하고 설득하며 안내할 의무가 있다. 지지자가 아닌 국가의 이익과 운명에 눈을 뜨고 귀를 기울어야 진정한 지도자이다. 그런 지도자가 절실한 대한민국의 오늘을 선량한 국민들은 하루하루 힘겨운 숨을 쉬어 내고 있다.

김성훈 변호사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리더라면 그 자리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리더는 국민의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길을 제시하고 설득하며 안내할 의무가 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