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법제처 홈페이지
하나의 실오라기를 잡아당기자 옷 전체가 풀려버리는 순간이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일부가 추진하는 ‘특정 국가 비하 표현 금지법’은 바로 그 실오라기다. 언뜻 보면 ‘혐오 없는 사회’를 향한 선한 제스처처럼 보이지만, 이 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들이 설계하는 국가의 맨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어내려 했던 과거의 집요한 시도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혀와 지갑과 새벽을 겨누고 있는 총구의 뿌리였음을.
‘자유’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불편하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며, 때로는 저속하고, 종종 기득권의 심기를 건드린다. ‘짱깨’나 ‘빨갱이’ 같은 거친 표현들은 세련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표현들이 터져 나오는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것은 때로 북한 정권의 폭압에 신음하는 탈북민의 절규이고, 중국 공산당의 패권주의와 중국인의 범죄에 위협을 느끼는 시민의 불안감이며, 거대 권력을 향해 개인이 던질 수 있는 유일한 돌멩이일 때가 있다.
국가가 ‘혐오’라는 이름의 소독약을 뿌려 이 모든 날것의 언어들을 박멸하려는 순간, 우리는 비판의 무기를 잃고 생각의 거세를 당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유’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예측 불가능한 힘을 너무나 잘 알기에, 통제 가능한 우리 안에 가두려는 것이다.
이 통제의 욕망은, 당신의 지갑을 넘어 당신의 삶 자체를 정조준한다. 그들은 먼저 ‘투기꾼’이라는 악마를 상정하고, 그들을 잡기 위해 시장 전체를 불태웠다. 그 불길 속에서 평생을 모아 집 한 채 마련한 중산층은 ‘잠재적 투기꾼’이 되었고, 청년들의 ‘내 집 마련’이라는 소박한 꿈은 신기루가 되었다. 국가는 선언했다.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재산의 소유와 처분이라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국가가 재단하겠다’는 섬뜩한 전체주의적 발상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믿지 않는다. 오직 국가의 계획과 배급만이 정의라고 믿는 그 철학은, 마침내 ‘부동산 거래 금지구역’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아이디어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재산권을 넘어, 헌법이 보장하는 ‘거주 이전의 자유’라는 기본권의 근간을 흔드는 발상이다. 오늘 내가 사는 집을 내일 팔 수 없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자유마저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사회. 내 집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의 문고리마저 국가가 쥐고 흔들겠다는 이 노골적인 선언 앞에서, 우리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손길은, 우리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새벽에까지 미쳤다. 새벽배송이라는 혁신은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한 결과가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 시장의 수요가 만나 폭발한 창의성의 산물이다. 그것은 워킹맘의 아침을 30분 더 여유롭게 했고, 1인 가구의 저녁을 풍성하게 만들었으며,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그러나 국가는 이 역동적인 삶의 현장에 ‘노동 시간’이라는 낡은 공장의 잣대를 들이댔다. 그들에게 새벽은 새로운 기회의 시간이 아니라, 통제되어야 할 ‘규제 밖 시간’일 뿐이었다. 국가가 정해준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소비하는 인간. 이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는 ‘올바른 국민’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베일속에 가려있는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 (연합뉴스)
그리고 마침내, 이 통제에의 집착은 가장 논리적이고도 섬뜩한 귀결에 다다른다. 그것은 더 이상 국민을 통제하는 수준을 넘어, 통제하는 권력 그 자체를 베일 뒤에 숨기는 단계다. 김현지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베일에 싸인 인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국정의 핵심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혹,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한 질문마저 ‘정치 공세’라는 이름으로 회피하고 묵살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통제사회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국민이 선출하지 않았기에 책임지지도 않고, 언론이 감시할 수도 없는 권력. 국민은 모든 것을 통제받지만, 정작 그 통제자는 누구인지 물을 수조차 없는 사회.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설계하는 국가의 완성형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철학으로 귀결된다. ‘국가는 선하고 유능하며, 개인은 이기적이고 미숙하다.’ 그러므로 국가가 개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 이것이야말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평생을 바쳐 경고했던 ‘노예의 길’의 입구다. 그 길은 언제나 ‘상생’, ‘공정’, ‘보호’라는 달콤한 말들로 포장되어 있다.
‘자유’를 뺀 민주주의는 시체에 옷을 입힌 것과 같다. 그들은 이제 국민의 언어를 검열하고, 재산권을 제약하며, 생활 방식마저 통제하려 한다. 그리고 그 모든 통제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질문과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려 한다. 이 모든 조각들이 맞춰진 그림은 명확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화국이 아니라, 국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관리사육장’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는 고단한 자유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국가라는 이름의 친절한 감옥 안에서 안락하게 사육당할 것인가.
이것은 보호가 아니다. 모욕이다.
박주현 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1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그들의 포장술에 혀를 내두를 지경
지금의 독재를 교묘한 말장난으로 독재로 보이지 않게 세심하게 치장 중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미약하나마 원고료 보냅니다.
무서울지경이네요
무서울지경이네요
끔찍한 독재로 가고있네요.
점점 숨이 막힙니다.
차근차근 이똥독재로 나아갑니다
민주주의가 뭐 대단하다고 국가가 모든 걸 다 해줄텐데... 탈북자가 공산주의가 싫어서 남한에 왔는데 남한이 공산주의자를 뽑았다고 웃던데... 코미디다
민주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 나라를 세우는 위대한 일에 니깟것들은 입 닥쳐. 동물농장 작가가 진짜 위대하다. 그 시대에 이걸 꿰뚫는 지혜라니
자유를 억압하면 그게 공산국가지 뭐겠어요? 진짜 너무 화가납니다.
국민 개개인의 자유에 국가가 개입한다는 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많이들 알아차려야 할텐데요. 이렇게 하나하나 빼앗기는 중인데도 말이죠.
좋은 칼럼입니다.
서서히 한가지씩 뺏아가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잘 체감하지 못하나..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통제를 당하고 있는건지..
하나의 실오라기의 퍼즐이 맞춰지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오늘도 간절히 바라게 되는....
통제 국가는 놉! 죽어도 노노노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