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칼럼] 인생의 난이도를 낮추는 방법
  • 김남훈 기자
  • 등록 2024-10-04 07:44:04
  • 수정 2024-11-24 10:00:26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더 로드' 같은 코맥 맥카시의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기계의 분해와 조립에 대한 그의 묘사다. 코맥 맥카시는 한때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는 복잡한 내연기관과 금속 프레임, 그리고 대용량 연료 공급망이 결합된 거대한 기계 뭉치로,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보통의 인간이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하고 비싼 '기계 뭉치'다. 더군다나 사람의 안전과도 연관이 되어 있기에 이걸 수리하고 고치는 것은 노동 이상의 가치가 부여되기도 하며, 작업자에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한다는 만족감도 주기 마련이다.

인생의 난이도를 설정하는 방법(그래픽=프레임메이커 그래픽팀, AI생성)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주인공 르웰린 모스는 베트남 참전 용사로, 우연히 사막에서 거액의 돈과 마약 거래의 흔적을 발견하며 인생이 뒤바뀐다. '경찰에 신고'하는 방법 대신 그 당시의 남자답게 행동한다.


그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알 수 없는 한 줄기 동정심이었는데, 첫 발견 당시 목숨이 붙어 있었던 마약 조직원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커다란 물통에 물을 담아 다시 현장으로 향했던 것. 그때 카르텔에게 들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르웰린 모스가 허름한 모텔 환풍구에 돈을 은닉하는데, 별것 아닌 장면임에도 영화에서도 꽤 길게 다루어진다. 그는 먼저 잡화점에 가서 텐트를 구매한다. 텐트에 포함된 폴대를 자르고 연결해 긴 작대기를 만든다. 그리고 드라이버로 환풍기 덕트 볼트를 풀어 돈가방을 넣고, 그 작대기로 쭉 밀어 넣는다. 그런 다음 다시 덕트 볼트를 조인다.


페이커 영화에서 나오는 대단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긴박한 장면도 아니다. 정말로 긴 작대기를 만들어 환풍기 안쪽에 돈을 숨긴다는 너무나 1차원적인 설정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어떤 긴장감과 충만함이 양립해 있다. 카르텔에 쫓기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제한적이다. 몇 안 되는 경우의 수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이런 1차원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누워 있는 시체를 발견하기 전까지 이런 삶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폴대를 자르고 덕트 테이프로 연결하고 볼트를 풀어대는 르웰린은 도자기를 만드는 명품 장인처럼 엄숙하고 살짝 평온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장면은 '더 로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구 문명 멸망 이후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아들과 아버지는 카트 하나를 밀며 지표 위를 표류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수단이자 도구는 그들의 삶처럼 순식간에 낡고 해져 버린 쇼핑카트인데, 이 작품에서 아버지가 몇 가지 도구를 이용해 카트의 바퀴를 수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카트를 뒤집어 상태를 확인하고 이물질을 제거한 후, 볼트를 풀어 바퀴를 꺼내어 모양을 살릴 수 있을지 또는 교체를 할지 결정한다. 도중에 어떤 은신처를 발견했을 때 발전기 같은 것들을 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도구를 사용하는 지성을 갖고 있다는 것, 버리지 않고 수리를 고려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약탈'을 하지 않는 인간성을 갖고 있다는 주인공 부자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이 작품들은 영화로도 보고 소설로도 읽었지만, 아마 영어 원작에서는 기계 뭉치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 재동작하게끔 하는 부분에서 영어 사용자들이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을 배치해 어떤 리듬감도 살렸을 것이라고 추론해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타인의 맥락을 알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가로저을 때가 있다. 그런데 카르텔과 킬러에게 쫓기면서도 긴 작대기를 만들고, 살기 위해 식인을 일삼는 무리들 앞에서도 삐걱거리는 쇼핑카트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늘 하던 것을 다시 늘 하고 싶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 대개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결론이 나지만 또 그렇게 하는 것. 그게 사람이다.그걸 알면 인생의 난이도도가 조금은 내려간다.

프로필이미지

김남훈 기자 다른 기사 보기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에 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chureee2024-10-08 09:41:29

    "타인의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기."

    언제나 시도하고 있는 짓입니다.
    잘 안되지만요...... ㅎ

  • 프로필이미지
    guest2024-10-05 08:13:26

    이 글의 끝부분을 보니 프레임메이커의 기사 중 이낙연총리님의 '영원한 것도 없지만 모두가 의미 있는 것이며,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그것이 누적된 것이 삶'이란 구절이 생각납니다.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meur2024-10-04 09:45:55

    영화이야기 너무 재밌습니다.

아페리레
웰컴퓨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분석] 론스타 4천억 승소 역겨운 광팔이 민주당... 3년 전에는? 2025년 11월 19일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태도가 13년을 끌어온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승소 국면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다. 3년 전, 법무부가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할 당시 "이길 확률이 전무하다"며 결사반대했던 정치 세력이, 막상 '전부 승소'라는 극적인 결과가 나오자 정.
  2. 썩어가는 것과 익어가는 것의 차이 가을 숲을 걷다 보면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 사이로 오묘한 냄새가 난다. 개중에는 잘 마르고 발효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윽한 향기가 있는가 하면, 물기를 머금은 채 질척하게 썩어가는 쿰쿰한 악취도 있다. 인간의 나이 듦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시간이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는 전혀 다른 화학 작용을 일.
  3. 민주당 '유동규 녹취록 속 대통령은 '윤석열'? 백광현 되치기 기자회견 17일 오전 백광현 씨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유동규와 남욱의 녹취록을 추가로 공개했다. 해당 녹취록에는 '이재명' 이름이 언급되어 있어 후폭풍이 예고된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 12일 진행한 기자회견의 후속편으로,  (2023년 봄 녹음)된 것으로, 대장동 사건을 두고 두 피고인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담겼다. 이 녹취록에서 ...
  4. 민주당을 향한 외통수 "대장동 환수법" 국가가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의 범죄 수익 환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상황에서 논란의 항소포기를 중심에서 처리한 박철우 검사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했다. 박철우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앉힌 인사는 이 사태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것은 실패에 대한 문책이 아니라, 성공적인 임무 완수에 대한 포상에 가깝다. 검찰 조직을...
  5. 대통령의 '무지(無知)'가 국가 안보의 최대 위협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그 자체로 전략이자 메시지다. 적대국과 총구를 맞대고 있는 분단국가의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내뱉는 안보 관련 발언은 천금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지난 24일 해외 기자 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보여준 인식은 가벼움을 넘어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는 50년간 대북 심리전의 핵심이었던 대북 방송을 "바보짓...
  6. 이낙연 "대장동 항소 포기는 국가 주도 범죄... 전체주의 망령 어른거려" 이낙연 "대장동 항소 포기는 국가 주도 범죄... 전체주의 망령 어른거려"대장동 항소 포기와 사법 시스템 붕괴 비판이낙연 새미래민주당 상임고문(전 국무총리)이 19일 유튜브 채널 '류병수의 강펀치'에 출연해 검찰의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 항소 포기를 "국가가 나서서 범죄자를 도와준 국가 주도 범죄"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
  7. 탱크만 없는 계엄령, 그 거대한 수용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2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교민들에게 "또 계엄하는 거 아닌가 걱정되실 텐데,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좌중에서는 웃음이 터졌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그 한가한 농담은,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
  8. YTN의 ‘자발적 복종’ 더불어민주당이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라는 좌표를 찍자, YTN은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의 풍자 영상을 다룬 보도를 삭제하고 한 발더 나아가 ‘정치인 SNS 영상 사용 금지’라는 사실상의 백기를 들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일어났다.'국기문란(國基紊亂)'. 유신 시대의 낡은 ...
  9. 프랑켄코리아 (Franken-Korea) 정치라는 무대 위에는 때때로 기이한 혼종(混種)이 등장한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이미 사라졌다고 믿었던 과거의 망령들을 덕지덕지 기워 붙여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것.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정권의 모습이 그러하다. 이들은 놀라울 만큼 창의성 없는 방식으로, 역대 정권들이 저질렀던 최악의 실수와 가장 추악했던 .
  10. 국민연금 손대려는 정권, 그래놓고 청년더러 "속았다" 하는가 아침 출근길 지하철 풍경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가. 붐비는 객차 안,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 화면에 몰입해 고개를 끄덕이는 4050 중년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의 작은 화면 속에서는 어김없이 '그'가 등장한다. 더부룩한 수염에 특유의 건들거리는 말투, 김어준 씨다.그 화면 속에서 김어준 씨와 패널들은 혀를 차며 말...
후원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