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19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후문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경내로 진입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공수처의 정치질에 대해 비판하는 칼럼을 썼더니 내가 윤석열을 편든다고 여기는 반응이 있다.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누구를 편들고 따를 만큼 겸손한 사람이 못된다. 유일하게 내 어머니 외에 이 세상에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불완전한 존재이며 하자와 모순투성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무게가 다른 것은 서로 견줄 수 있지만 가진 저울이 다르면 그 간극을 설명하는 것이 참 난감하다.
정치영역에서 유독 사람에 집중하는 것은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리 단순한 분야가 아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경험이 누적 되어도 어려운 것이 정치다. 그렇다보니 간편한 접근법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인 것이다.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가 아닌 누구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지를 가지고 성향을 분류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원리를 구현하는 유용한 방법이기는 하다. 국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일이 토론하고 설득하며 최적의 결론에 이르는 것은 현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여론을 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정당과 선거제도를(대의제) 도입하였다. 그런데 이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다.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약점도 있다. 사람에 집중해 가치를 양보하는 부작용에 취약하다. 편차를 무시하고 큰 덩어리로 묶다 보니 구체적 사안에서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따라 왔다고 자부한다. 그냥 태생이 그러했기에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눈에 띄는 정치지도자들도 있었다. 신기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때로는 대리만족을 하고, 기회가 되면 가능한 범위에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치의 길이 사람마다 항상 같지는 않다. 사람의 생각이 어찌 다 같을 수 있는가? 사안에 따라 길이 갈라지기도 하고, 다른 길에 있던 사람과 나란해지기도 한다. 가치를 따라가다 보면 길도 역동적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저울에 남을 올려 놓은 채 반역이니 변절이니 전향이니 하는 평가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몇 년전 나는 가는 길이 달라진 분과 트위터 맞팔을 끊었다. 그 분은 수많은 맞팔 중 한명이라 인지도 못하겠지만 나에겐 의미가 있었다.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설마 아닐 것이라며 나를 속이기 싫었다. 가치를 따라 만났고, 방향이 같아 가까이 있었을 뿐, 갈림길에서 각자 길을 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전히 그 분 좋아하고, 편하게 목가적 생활을 누리길 항상 기원 드린다. 그 분의 가치와 선택을 감히 내가 논할 것도 아니다. 이해하고 응원한다. 다만 내 생각을 그 분에 맞춰 성형하지 않을 자유 정도는 나에게 있다. 그런데 이 일로 나는 쌍욕을 들었다. 대통령님과의 언팔이 건방지다는 이유다. 그중에는 내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재명의 집단 고발 사건이 있었을 때 내가 익명을 포기하고 나선 것은, 정치인이 주권자의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가치를 따른 것이었다. 로펌을 닫고 경기도로부터 탄압 받던 남양주로 달려 간 것도, 스위트 홈으로 여겼던 민주당을 탈당한 것도, 새민주 창당에 함께 한 것도, 그 과정에서 했던 모든 선택과 결정들도 내 나름의 가치를 따랐던 것이다. 그것이 특정 사람을 중심으로 보면 친화적으로 보일때도 있고 이질감이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에 관심이 없다. 무작정 사람을 따르면 그 내재적 한계에 갇히며 정작 그 사람을 위한 가치까지 잃을 수 있다. 사람을 위하는 것은 그 사람을 떠나 상위의 가치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 사람은 배, 가치는 등대와 같다.
윤석열의 망상에서 비롯된 계엄선포 행위는 처참할 정도다. 우리는 참 박복한 국민이다. 그 위험한 인물이 탄핵소추로 일단 직무에서 배제된 것은 다행이다. 이제 그에 대한 사법적 단죄, 냉정한 역사적 평가를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상황들은 매우 불편했다. 우리나라는 선진적인 사법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헌법에 의해 권력이 나눠져 있고, 각 헌법기관은 서로 견제하고 조화를 이루며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이 지배하는 국회는 이런 국가시스템을 우습게 여기고 월권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수사기관의 장을 불러 수사지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사건 관계자들을 대거 소환해 무차별적 신문을 하였다. 군사정권을 방불케 하는 자백강요, 법원 재판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형사소송의 모든 원칙을 무시하고 내리는 유죄결론, 이를 보고 있자니 마치 역사를 중세로 옮겨 놓은 듯한 공포감이 엄습했다.
여기에 동조하며 민주당의 행동대장을 자처한 것이 공수처다. 이때다 싶어 존재감을 보이려는 행보를 보였다. 물 들어오자 노 젓겠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민주당의 하명을 넙죽넙죽 받아 칼춤을 췄다. 민주당이 원하는 그림을 앞장서 그려주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민주당은 공수처장에게 당장 윤석열을 긴급체포 하라고 했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끌려 가는 그림을 만들라는 요구다. 공수처장은 냉큼 그러겠다고 했다가 막상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긴급체포는 영장주의 예외라서 체포여부에 대한 판단책임이 수사기관에 있기 때문이다. 재차 출석한 자리에서 법원에 체포영장 청구를 검토 하겠다며 발을 살짝 뺐다. 영장체포는 이렇게 민주당이 몰아 세우는 과정에서 공수처가 출구전략으로 선택한 방법이다. 사법적 필요가 아니라 정치적 쇼에 공수처가 칼춤을 췄다고 비판한 이유다. 윤석열의 잘못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그에 대해 가해지는 공권력의 공정성을 문제 삼는 것은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체포영장은 소환불응이 있으면 발부된다. 죄가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소환해 봐야 어차피 묵비를 하면 그만이므로 영장체포가 수사에 특별히 의미 있는 절차가 아니다. 이재명이 반복해 소환불응을 하더라도 검찰은 체포영장을 청구한 적이 없다. 국민들은 체포와 구속의 차이를 잘 모른다. 그저 죄를 지어 끌려가는 이미지만 부각된다. 수사상 실익은 없고 정치적 망신을 주는 효과만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에 대해 체포와 입건이 추가 되었다. 공권력과 공권력의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이 무슨 국가적 낭비인가?
이러한 이유로 나는 공수처와 민주당을 비판한 것이다. 이는 윤석열 편을 들어서가 아니라 공권력이 정치권의 성화에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이재명과 민주당에 대해 사법시스템은 매우 신사적이며 절제되고 교과서적인 집행이 이루어졌다. 그게 원칙이라고 외쳤던 민주당이 윤석열에 대해 보이는 모순적 태도가 아무렇지 않은가? 그냥 모두 윤석열 몰아 세우는 판에 올라타 같이 축제를 벌이면 정의롭고 정당한 것인가? 목적만 같으면 수단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민주당에게는 물이 들어 왔다. 그들이 노를 젓는건 그들의 비즈니스에 부합한다. 그런데 제3의 길을 걷는 정치세력들이 그 물에 뛰어 들어 같이 노를 저어 주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 방식이야 어떻든 같이 윤석열을 물어 뜯어야 정의롭다고 생각하는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면 정치적으로 소외 될까봐 겁이 나는가? 이재명과 비교해 진정 절차적 형평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재명에 비해 윤석렬에 대한 사법절차가 가혹하다거나 최소한 과잉이라는 의견표출은 암묵적 금기인가?
윤석열은 멍청하고 이재명은 사악하다. 국가 입장에서는 둘다 해롭다. 다만, 멍청한 사람은 만만하고 사악한 사람은 조심스럽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다. 이재명을 상대 했던 사법시스템은 매우 공손하고 조심스러웠으며 절차적 정당성에 매우 예민했다. 수사에 비협조 적이라도 체포영장은 청구된 적도 없고 공범이 모두 구속된 상태에서 청구된 구속영장도 야당대표가 도주하겠냐며, 증거인멸 하겠냐며 기각 했다. 그런데 윤석열에 대해서는 망신주기용 체포영장에 이어 수사권 여부나 관할위반 여부도 문제될 것 없다며 경박하게 움직였다. 다 상관없고 문제 없단다. 이재명에 대해서는 한 없이 절제된 공권력, 윤석열에 대해서는 한 없이 가벼운 공권력, 이것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다면 그것은 망상으로 인한 계엄보다 위험한 신호라고 생각한다. 이에 침묵하는 것은 올바른 정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석열에 대해 강한 성토를 하는 정치인들 중 이재명에 대해 직접적으로 같은 어조로 비판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이재명 이름 하나 언급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다가 윤석열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윤석열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거기에 앞다퉈 끼어 든다고 무슨 존재감이 있겠는가? 사람을 따르지 말고 가치를 따라 무소의 뿔처럼 가는 정치인, 그런 정당이 결국은 살아 남지 않을까?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 국민에 경계가 있고 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를 추구 했다면 난민이 된 윤석열 지지자들에게 위로를 선물 했을지 모른다. 이는 나중에 청구서를 내밀 수 있는 투자다. 1%의 지지도 아쉽다면 이번 기회는 정말 좋은 비즈니스 기회였다. 그것도 가치를 추구하면서, 즉 명분을 챙기면서 말이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 국민의 지지를 받겠다는 정당은, 사람이 아닌 가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확장성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세상의 사각지대를 살펴, 이를 증폭해 외치고, 비록 불이익이 있어도, 비록 오해를 받는 한이 있어도 일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존재감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선택적으로 입장을 정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비즈니스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비즈니스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괴물이 이재명과 그의 민주당이라 생각한다.
가치를 추구하다면 보면 때로는 보수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고, 심지어 이재명을 편들어 주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이다. 하나에 일관성을 취하면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가치를 고집할 때 확장성이 생기고 주목을 받을 수 있다. 대세에 올라타 존재감 없는 행보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진짜 비즈니스가 필요하다면 더욱 대세와 차별화 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 혼란은 제3세력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국민의 고통을 생각하면 다시 와서도 안 된다.
이 기사에 8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윤석열은 멍청하고 이재명은 사악하다. 국가 입장에서는 둘다 해롭다. 다만, 멍청한 사람은 만만하고 사악한 사람은 조심스럽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다.......
사람을 따르지 말고 가치를 따라 무소의 뿔처럼 가는 정치인, 그런 정당이 결국은 살아 남지 않을까?....
정치적 혼란은 제3세력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국민의 고통을 생각하면 다시 와서도 안 된다".
해박하고 깊이 있는 글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훌륭한 자식에게 유일하게 존경받는 김변님의 어머님이 부럽습니다.
너무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야속할 뿐..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 깊이 공감합니다.
성찰과 깊이있는 한 편의 정치 사회 인문학 칼럼,
저장합니다.
공감합니다. 주변 지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너무나 공감할수밖에없는 기고문에 위로받습니다 표현이 부족해 rt만하던저와 국민들께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민주당의 횡포에 무너진 사법시스템과 공권력의 남용이 눈에 보이는 데도 이.재.명이란 이름을 거론하며 현상황을 비판하는 정치인이 없다는 게 개탄스럽네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따뜻한 마음의 냉철한 표현. 위로가 되는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