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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침 없는 자를 사면하는 나라는 없다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8-13 03:15:35
  • 수정 2025-08-13 0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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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 복권이 한국 사회에 던진 비수(匕首)
  • 반성이라는 최소한의 사면요건마저 파괴하는 위험한 선례
  • 뻔뻔함이 승리가 되는 비정상 국가로 가는가

상상하는대로 세상이 바뀐다는 '시크릿'류의 헛소리 중 유일하게 내가 인정하는 게 있다면 바로 이 네 가지 말을 많이 하라는 것이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용서해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낯간지럽고, 때로는 상대에게 원치 않는 책임을 지우는 폭력이 되기도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확실히 인생의 물길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리는 힘을 가졌다. 망가진 관계를 기워내고,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내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낯선 타인과 기묘한 연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적 기적이다.


‘미안하다’는 말과 '용서해달라'는 말은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과 같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그 말 한마디는 과거의 특정 좌표로 우리를 데려가 사건을 재구성할 힘을 준다. ‘나의 잘못’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정함으로써, 상대방에게는 ‘너의 상처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망가진 시간과 감정에 대한 뒤늦은 복원 작업이다.


그런데 이 마법 같은 단어들이 유독 힘을 잃고 소멸해버리는 세계가 있다. 바로 여의도라는 섬이다. 그곳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곧 정치적 사망 선고와 동의어가 되고, ‘용서’는 나약함의 증거로 치부된다.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언어들이 증발해버린 그곳은, 삐걱거리는 기계들의 소음으로 가득한 거대한 고철 처리장 같다.


그리고 이 언어의 파괴와 오염 현상을 가장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조국이다. 그는 이 숭고한 단어들을 사용하는 척하면서, 그 본질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조롱하는 방법을 우리 사회에 똑똑히 전시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내가 그를 왜 그토록 혐오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다. 그의 위선이나 이중성을 넘어선,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 그는 ‘사과’라는 공적 언어의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린 파괴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물론 그는 ‘송구하다’, ‘마음의 빚이 있다’ 같은 말들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것은 사과의 형태를 흉내 낸 위조지폐와 같다. 얼핏 보면 지폐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빛에 비춰보면 결정적인 ‘숨은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제가, 제 아이의 입시를 위해 문서를 위조했습니다”라는, 여섯 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이 명백한 사실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뱉은 적이 없다.


그의 불인정(不認定)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공격적인 형태의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다.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너희가 분노하는 그 ‘입시 비리’는 사실 별거 아니야. 너희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이 이상한 거야. 진짜 문제는 나를 핍박하는 검찰과 언론이야.”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우리 모두의 현실 감각을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규칙을 지키며 살아온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시대의 흐름도 모르는 순진한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는 곧 사면된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는 윤미향 역시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의 피맺힌 절규 앞에서도 그는 결코 자신의 잘못을 명쾌하게 인정한 적이 없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 그리고 지지자들의 맹목적인 보호 뒤에 숨어 상식적인 비판을 ‘정치 공세’로 치부하는 오만함이다.


그래픽 : 박주현 반성없는 사면은 상식에 대한 조롱

사면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법률 조항 이전에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상식이다. 그러나 이재명은 이 상식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사과’라는 행위 자체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이제 이 나라에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패배자가 되고, 끝까지 버티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승리자가 되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환멸의 정체다. 한두 명의 파렴치한 정치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그들을 비호하고, 그들의 뻔뻔함을 ‘정치적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포장하며, 끝내는 국가의 권위로 그들의 죄를 씻어주는 거대 정당의 행태에 대한 절망이다. 그들은 지금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 즉 ‘잘못은 사과해야 하고, 용서는 반성 뒤에 온다’는 이 간단한 원칙을 망가뜨리고 있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회 그 자체에 대한 테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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