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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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의 복귀작 A2O LITE(사진: A2O 엔터테인먼트)

보는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든다. 멤버들의 얼굴에서 보아와 소녀시대의 태연, 제시카, 에프엑스의 크리스탈과 설리가 차례로 떠오른다. 멤버 구성도 소녀시대 처럼 9명이고 스타일링은 초기 S.E.S 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닮았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얼굴의 분위기와 표정,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 춤 추는 스타일과 카메라가 멤버들을 포착하는 방식까지, 지난 20여 년 동안 SM이 만들어온 여성 아이돌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는 뜻이다. 분명히 '아는 맛' 이고 들었던 노래같은데 이상하게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 SM 엔터테인먼트를 떠난 지 3년여 만, 하이브와의 경업금지 약정이 끝난 이수만이 선보인 9인조 걸그룹 A2O LITE 다. 

과장되지 않은 헤어와 투명한 메이크업, 자연스러운 듯 하지만 실은 머리카락 한 올 끝까지 정교하게 계산된 스타일링에는 민희진의 뉴진스 이후 K팝에서 익숙해진 미니멀한 감각도 있다. 여기에 이수만 특유의 차갑고 미래적인 분위기가 더해진다. 어딘가 2026년형 에프엑스, 또는 사이버틱한 뉴진스라고 할까. 과거 SM 걸그룹의 미학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면서도, 지금의 감각으로 다시 조립한 이미지다.

듣자마자 '아, 이건 SM 음악이구나' 싶다

곡의 흐름을 절정으로 몰아가는 고음 파트, 분위기를 전환하는 브리지, 신성하고 극적인 보컬, 랩과 댄스 브레이크 까지. 한 곡 안에서 여러 장면이 펼쳐지는 구성은 이수만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그리고 세계인이 열광했던 초기 'K팝'의 문법이다. 그 문법을 함께 만들어온 유영진이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최근 K팝에서는 곡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렴이 등장하고, 짧고 강렬한 후크를 반복하는 음악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틱톡과 유튜브 쇼츠에서 활용하기 좋은 안무와 귀에 꽂히는 멜로디가 음악의 핵심 경쟁력이 된 시대다. 2분대의 짧은 곡이 낯설지 않고, 노래 전체보다 15초 짜리 킬링 파트가 먼저 소비되기도 한다. 짧은 노래라고 나쁜 음악은 아니다. 간결한 구성 안에서도 뛰어난 음악적 성취를 보여주는 아티스트는 많다. 문제는 음악의 길이가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방식이 플랫폼의 소비 문법에 지나치게 종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A2O LITE의 등장이 흥미로운 이유

이수만은 여전히 한 곡 안에 여러 음악적 장면들을 집어넣고, 보컬과 퍼포먼스의 극적인 전환을 통해 완결된 무대를 만들려 한다. 강렬한 한 소절만 남기기보다는 노래의 기승전결을 만들고 각각의 끝에 볼거리를 배치한다. 음악을 짧게 잘라 소비하기 이전에 한 곡 전체를 듣고, 하나의 공연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수만(그리고 유영진) 의 스타일이 반드시 더 우월한 음악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요즘의 주류 제작 경향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반갑다.

이수만을 향한 가장 손쉬운 비판은 '자기복제'다. 실제로 그의 새로운 그룹에서는 과거 SM의 음악과 비주얼, 세계관이 반복되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다작을 한 프로듀서 답게 흑역사도 많다.  A2O LITE 역시 자신이 이미 성공시킨 공식을 다시 꺼내 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자기복제이고, 어디부터가 창작자의 고유한 스타일일까.

우리는 영화감독의 반복되는 화면 구성과 주제의식을 작가주의라고 부르고, 패션 디자이너가 평생 고수하는 실루엣을 시그니처라고 부른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취향과 스타일, 화성과 무대 연출을 오랫동안 발전시키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면? 단순한 반복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 체계가 될 수 있다.

물론 고유한 스타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복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익숙한 공식을 다시 사용하는 것과 그 공식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은 다른 일이다. A2O LITE 의 성패 역시 그 차이에서 결정될 것이다.

SM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걸그룹 소녀시대 (사진=LG전자·위키미디어 커먼즈(CC BY 2.0))
SM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걸그룹 소녀시대 (사진=LG전자·위키미디어 커먼즈(CC BY 2.0))

K팝 한계론? 산업은, 아니 음악은 어디로 가야 할까?

K팝은 이제 세계적인 음악 산업이 됐다. 한국어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K팝 아티스트들이 세계 주요 공연장을 채우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넷플릭스를 통한 'K팝 데몬 헌터스' 의 세계적인 성공은 상징적이다. 한국 자본의 개입 없이 글로벌을 타겟으로 외국인 시각에 한국적으로 어필하는 콘텐츠를 만들면 히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세계화와 산업적 성공이 곧 음악적 다양성의 확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공한 공식을 반복하려는 유혹은 커졌다. 영어 가사의 비중이 높아지고, 해외 팝 시장의 유행을 빠르게 반영하는 걸 넘어 모방하고, 짧은 영상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는 후렴과 안무가 중시된다. 일부 정상급 아티스트에게서도 모험을 하는 대신 이미 검증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감지된다. 그 와중에 '한국판 코첼라' 기획과 'K팝 한계론' 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수만의 복귀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들고 왔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한때 K팝 시대를 열었고 그 시대를 대표했던 사람이 자신의 장기를 다시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장르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구성,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극적인 전개, 강한 보컬과 칼 같은 군무, 현실을 초월하고 미래를 오가는 세계관. 이것들은 이수만의 스타일이었고 K팝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축적해온 자산이었다.

이수만은 K팝을 혼자 만든 사람이 아니다. 수많은 작곡가와 안무가, 스타일리스트, 영상 제작자, 무엇보다 아티스트들이 함께 만들어온 산업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요소를 하나의 제작 시스템으로 결합하고, 아이돌 음악의 독자적인 문법으로 발전시키는 데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74세 현역, '수만옹' 이 들고 온 '아는 맛' 

그런 이수만이 74세의 나이로 돌아와 다시 한번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AI와 첨단 영상 기술, 새로운 팬 소통 플랫폼이 중시되는 2026년에 그가 강조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K팝 그룹이 가수인 이상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결국 곡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복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물론 A2O가 실제로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과거 SM의 성공 공식을 2026년 버전으로 다듬은 것만으로 오늘날의 치열한 K팝 시장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럼에도 이번 복귀가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K팝은 세계를 정복하는 동안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더 짧고, 더 빠르고, 더 쉽게 소비되는 음악이 반드시 더 진화한 음악인가. 한때 K팝의 미래를 설계했던 프로듀서가 자신의 오래된 문법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오래된 문법이 오히려 새롭게 들린다.

이수만이 새로워졌다기보다, K팝이 그가 만들었던 음악으로부터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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