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귀재'로 불리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2025년 겨울,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소프트뱅크 주가는 10월 이후 40% 이 폭락했고, 손 회장의 개인 자산도 하루 만에 수십억 달러가 증발했다. 그가 '엔비디아'를 너무 일찍 팔아치운 탓도 있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가 베팅한 '오픈AI' 진영이 구글의 무서운 추격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이 내놓은 자체 칩 'TPU v7(아이언우드)'과 이를 탑재한 '제미나이 3.0'은 엔비디아 GPU 없이도 압도적인 성능과 비용 효율성을 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엔비디아의 주가가 흔들리고, 시장이 "엔비디아 천하가 영원하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이재명 대통령이 APEC에서 들고 온 '26만 장 GPU 확보'라는 자랑을 냉정하게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31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장인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면담 전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엔비디아 제국의 균열, 그리고 구글의 '탈(脫) GPU' 선언
지금까지 AI 시장의 공식은 간단했다. "엔비디아 GPU를 더 많이 사는 자가 이긴다." 하지만 2025년 말, 이 공식은 깨졌다. AI 산업의 중심축이 모델을 만드는 '학습(Training)'에서, 서비스를 돌리는 '추론(Inference)'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추론 시장에서는 비싸고 전기를 많이 먹는 엔비디아 GPU보다, 특정 목적에 최적화된 구글 TPU나 주문형 반도체(ASIC)가 훨씬 효율적이다.
실제로 엔비디아의 최대 고객 중 하나인 메타(Meta)조차 2027년부터 구글 TPU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은 엔비디아 주가 하락의 결정타가 됐다. 소프트뱅크가 휘청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엔비디아 GPU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오픈AI의 고비용 구조가, 자체 칩으로 무장한 구글의 수직 계열화 모델에 밀릴 수 있다는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 격변 속에서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 AI 컴퓨팅 센터'와 '26만 장 GPU 확보' 계획은 자칫 시대를 역행하는 투자가 될 위험을 안고 있다.
'상투 잡기'의 위험
정부는 2030년까지 엔비디아의 최신 GPU(블랙웰 등) 26만 장을 들여오기로 했다. 하지만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들은 이미 '탈 엔비디아'를 외치며 자체 칩 비중을 높이고 있다. 전 세계가 호환성 높고 저렴한 대안을 찾아 떠나는데, 한국 정부만 엔비디아의 가장 비싼 고객으로 남을 수 있다. 이는 심각한 '벤더 락인(Vendor Lock-in)'을 초래해, 향후 엔비디아가 부르는 게 값이 되는 상황을 만들 것이다.
'전기 먹는 하마'를 감당할 수 있는가
26만 장의 GPU를 돌리는 데 필요한 전력은 약 1GW, 원자력 발전소 1기 분량에 맞먹는다. 이미 수도권 데이터센터는 전력이 부족해 아우성이다. 양향자 전 의원의 지적처럼 "전기 대책 없는 GPU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구글이 TPU를 개발한 핵심 이유 중 하나도 전력 효율성 때문이었다. 전력 수급 계획 없이 하드웨어만 들여놓는다면, 13조 원짜리 장비들이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소프트웨어와 국산 NPU의 부재
하드웨어는 감가상각이 빠른 자산이다. 진정한 AI 경쟁력은 하드웨어를 다루는 소프트웨어 기술과,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국산 반도체 생태계에서 나온다. 리벨리온이나 퓨리오사AI 같은 국내 기업들이 엔비디아보다 전력 효율이 뛰어난 칩을 만들고 있음에도, 정부의 계획은 외산 칩 수입에만 방점이 찍혀 있다. 이는 국내 AI 반도체 산업의 싹을 자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엔비디아 26만 장은 분명 강력한 무기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전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손정의 회장의 실패는 "특정 기업(엔비디아)과 특정 모델(GPT)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이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이재명 정부는 GPU 확보 숫자에 매몰되지 말고, **'AI 포트폴리오의 다변화'**로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하이브리드 인프라 : 엔비디아 GPU는 초거대 모델 학습용으로 제한하고, 대국민 서비스용 추론 인프라는 국산 NPU나 가성비 높은 대안 칩으로 구성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주권 :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CUDA)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하드웨어를 유연하게 구동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정의 인프라(SDI)'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에너지 리얼리즘 : 26만 장을 가동할 구체적인 전력 공급 로드맵(SMR, 송전망 확충 등)을 먼저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구글의 부상과 소프트뱅크의 위기는 "영원한 1등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GPU 부족이 아니라, 변화하는 판을 읽지 못하고 비싼 값을 치르며 '과거의 기술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다. 26만 장의 GPU가 대한민국의 AI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지, 아니면 세금만 축내는 애물단지가 될지는 지금의 전략 수정에 달려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26만장 중 절반이라도 국산·구글·아마존 Trainium으로 돌려라. 그게 상식이다.
윤갑희 기자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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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분야라 한참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