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적으로 민주당은 승리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있다.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라는 철퇴를 맞았지만, 고등법원이 판결을 미루면서 그들은 숨 쉴 공간을 얻었다. 지지율 조사에서는 항상 1위, 당내 경선에서는 90%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어느 정치인이 이런 상황에서 초조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행동은 패배의 그림자를 진하게 드러낸다.
사법부를 향한 손가락질은 날카롭다. 아군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규정하고, 법관들을 탄핵 명단에 올리거나 청문회라는 이름의 공개 처형대에 세우려한다. 선거법을 밤새 뜯어고치고, 재판중지법이라는 이름의 방탄조끼를 서둘러 입는다. 온라인 뒤편에서는 '개딸'이라 불리는 열성 지지자들이 상대 진영의 가장 약한 후보를 내세우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는 소문이 돈다.
승리를 코앞에 둔 선두주자라면 숨을 고르고 발을 맞추며 실수 없이 결승선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정석이다. 그런데 그들은 내란 특검 100명이라는 기이한 숫자를 꺼내들고, 내란 재판부라는 헌법 교과서 어디에도 없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국가의 틀을 뒤흔드는 발언들이 일상처럼 쏟아진다. 윤석열이 내란 수괴라 열을 올리면서도, 자신들은 그에 못지 않은 상황을 끊임없이 연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과 이재명을 계엄의 원인 제공자로 여기는 국민들이 과연 소수일까? 침묵하는 다수가 품은 생각은 여론조사 통계치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차가운 거실에 앉아 뉴스를 보다가 문득 예전에 스타워즈 속 요다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친다. "두려움은 어둠으로 가는 길이다. 두려움은 화를 불러오고, 화는 미움을 불러오며, 미움은 고통을 불러온다." 말의 주인공은 허구지만 진실은 아프게 박힌다.
민주당과 이재명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역대 대선에서 워낙 지지율의 격차가 컸던 이명박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세론이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는 역사의 유령이. 한 번 이상 패배를 맛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 특유의 두려움이다. 선거일 전날까지 앞서 있다가 뒤집힌 기억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 속삭인다. 그들의 거친 호흡과 급한 행보는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한 의식 같아 보인다.
하지만 더 크고 조용한 무언가가 그들을 두렵게 한다. 침묵하는 다수의 집단지성이다. 카메라 앞에서 열광하는 지지자들 너머에 있는, 말없이 자신의 판단을 숙성시키는 그 무리들. 그들은 SNS에 정치적 견해를 남기지 않고, 여론조사 전화가 오면 고개를 저으며 끊고, 길거리 마이크가 다가오면 살짝 방향을 틀어 피한다. 그저 선거일 아침에 조용히 나타나 종이 한 장에 자신의 판단을 새길 뿐이다. 소리의 크기와 인구수는 정비례하지 않는다.
역설이 여기에 있다. 패배를 두려워한 나머지 취한 행동들이 또 다른 패배의 씨앗을 뿌린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 주변은 항상 텅 비게 마련이다. 극단적 대응은 중도층의 발걸음을 돌려세우고, 침묵하는 다수를 서서히 적으로 만든다. 그들이 투표소의 파란 천막 뒤에서 내리는 판단은 지금 SNS 타임라인을 가득 채운 격렬한 응원전과는 결이 다를 수 있다. 온라인에서의 함성은 때로 현실의 침묵을 가리는 장막이 된다.
두려움은 항상 두 갈래 길을 만든다. 도망치거나, 맞서거나. 민주당은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문제는 그 싸움이 실체 없는 적과의 전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소음에 피로해진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명씩 극장을 빠져나간다. 그들은 다른 극장을 찾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선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 패턴이 보인다. 결국 두려움보다는 희망에 투표하는 사람들이 이긴다. 두려움은 다리를 옭아매지만, 희망은 날개를 달아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오늘의 환호가 내일의 침묵으로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역사의 페이지를 몇 장 넘겨보자. 1948년 미국 대선에서 해리 트루먼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패배가 확실시됐다. 시카고 트리뷴은 '듀이, 트루먼 꺾다'라는 헤드라인을 미리 인쇄했다가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 1980년 레이건과 카터의 대결에서도 막판까지 박빙이었지만, 투표일에 침묵하던 다수가 레이건에게 압도적 표를 몰아주었다. 2016년 트럼프의 승리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는 힐러리의 우세를 점쳤지만, 러스트 벨트의 침묵하던 노동자들이 판을 뒤집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은 당내 경선 이후 지지율이 급락했지만, 투표일에 20대와 30대가 침묵을 깨고 투표장으로 몰려왔다.
침묵하는 다수는 늘 존재해왔다. 그들은 지지 후보가 없거나, 자신의 선택을 드러내길 꺼리거나,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소음이 아닌 진정한 희망이 있는 쪽이다. 그리고 그 어떤 역사속에도 두려움에 떠는 자가 승리하는 일은 없었다.
이 기사에 1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침뮥하는 다수가 옳은 선택을 해서 이낙연 상임고문님이 승리하깅 바랍니다.
공감이 많이 되네요..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옳습니다. 제풀에 지치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벼랑 끝에 내몰린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습니다.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꿈꾸는 분들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낙연이 현재 우리나라의 희망입니다
제발 그렇게 되기를, 침묵하던 국민이 투표장에 나와 말없이 정의에 한 표 찍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와 엄청난 글이네요, 짝짝, 괴물국가 막을 수 있어요.
이낙연총리가 희망입니다
민주당과 이재명때문에 무섭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숨죽이고 있지만..
용기내주시면 가능하리라 봅니다만
힘든길이란걸 알기에..ㅠ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칼럼 감사합니다.
통찰이 느껴지는 글에 위안을 받습니다. 저들의 웃음이 진실이 아닌 두려움이니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보겠습니다.
옛적 서프라이즈를 읽는 느낌입니다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부디 우라의 희망을 꺽지 말아주시길 이낙연총라깨 머라숙여 부탁드립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