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해리와 샐리>를 만든 라이너 부부의 죽음, 그 서글픈 아이러니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12-17 16:51:29

  • 부모는 시나리오를 건넸고, 아들은 흉기로 답했다

롭 라이너 감독 부부롭 라이너 감독 부부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거실 소파 위, 두 덩어리의 털뭉치가 나른하게 하품을 한다. 나를 집사의 길로 안내한 ‘해리’와 ‘샐리’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지어준 먼 나라의 할아버지가 지난 15일, 어떤 끔찍한 최후를 맞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따뜻한 햇살 아래서 서로의 털을 골라주며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 평화로운 풍경이 오늘은 유독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린다.


로맨틱 코미디의 바이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연출한 거장 롭 라이너 감독 부부가 LA 자택에서 살해당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범인은 다름 아닌 그들의 친아들, 닉 라이너였다.


롭 라이너. 그는 우리에게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사랑이 시작되는 가장 설레는 순간을 선물했던 사람이다. 영화 속 해리와 샐리는 12년의 엇갈림 끝에 마침내 서로를 끌어안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꿈꿨다. 내가 이 작은 생명들에게 그 이름을 붙여준 것도, 녀석들의 삶이 그 영화처럼 마냥 사랑스럽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현실의 엔딩 크레딧은 너무나 잔혹하게 올라갔다. 이 비극이 더욱 뼈아픈 건, 라이너 부부가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부모였기 때문이다.


닉이 10대 시절부터 약물 중독으로 나락을 헤맬 때, 부모는 아들을 쫓아내거나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의 아픈 경험을 시나리오로 옮겨 <비잉 찰리>라는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그것은 영화라기보다, 예술이라는 도구를 빌려 아들을 세상으로 다시 끌어올리려는 부모의 필사적인 밧줄이었다. "우리는 너를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부부는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약물과 증오에 잠식된 아들의 영혼에는 그 목소리가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모가 내민 구원의 밧줄은, 결국 아들의 손에 들린 흉기가 되어 돌아왔다. 사랑으로 쓴 시나리오가 피로 쓰인 비극으로 덮이는 순간이었다.


뉴스를 보고 난 뒤, 나는 괜히 자고 있는 고양이 해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체온이 따뜻해서 가슴이 아려왔다. 영화 속 샐리는 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누군가와 남은 인생을 같이 보낼 거라는 걸 깨달았을 때, 너는 그 남은 인생이 하루라도 빨리 시작되길 바랄 거야."


라이너 부부는 아들과 함께할 '남은 인생'을 그토록 간절히 바랐을 텐데, 그 남은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게 끊겨버렸다. 스크린 속의 해리와 샐리는 영원히 늙지 않고 뉴욕의 거리를 걷겠지만, 그들을 만든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인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지만, 어떤 인생은 예술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끝이 난다.


내 고양이 해리가 잠꼬대를 하며 샐리의 품을 파고든다. 녀석들은 여전히 건강하고 예쁘다. 그래서 더 슬프다. 세상의 모든 해피엔딩이 이 작은 털뭉치들에게만 남아있는 것 같아서. 저 멀리 LA의 차가운 부검실에 누워있을 노부부에게, 오늘은 작별 인사 대신 내 고양이들의 따뜻한 그루밍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부디 그곳에서는 고통 없는 사랑만 하시기를.


음원서비스에서 낙원전파사를 만나보세요

관련기사
TAG

프로필이미지

박주현 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lrrp04712025-12-17 17:59:27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행복만 하시길..

아페리레
웰컴퓨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현장] 이낙연 "현 정부, 계엄 청산 명분으로 민주주의 훼손"... 국가과제연구원 심포지움 개최 사단법인 국가과제연구원이 주최한 '위기의 민주주의: 현상과 대안' 연례 심포지움이 11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프레스클럽에서 열렸다. 심포지움은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출범한 이재명 정부 6개월을 평가하고,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현실을 진단하기 위해 마련됐다. 기조연설에 나선 이낙연 국가과제연구원장은 현재 ...
  2. 대통령의 '무능 자백'이 가장 재미없는 뉴스가 된 나라 솔직히 말해서, 이재명 대통령은 천운을 타고났다.며칠 전 대한민국 국정 책임자가 부동산,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입으로 내뱉었다. 이건 단순한 실언이 아니다. 승객을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까지 배를 몰고 나온 선장이 "나 사실 운전할 줄 모른다"고 방송한 거나 다름없는 황당한 상황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광장이 뒤집어지고 지지율.
  3. 전병헌의 시일야방성대곡...."지식인조차 침묵해 구한말보다 암울" "지금 대한민국은 깊은 병리 현상에 빠져 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도 꺼지지 않던 양심의 목소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전병헌 새미래민주당 대표가 10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현 시국을 구한말 '시일야방성통곡(是日也放聲痛哭)'의 상황에 빗대며 지식인 사회의 침묵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재명 정부와 거대 여당의 사법부 무..
  4. 조진웅이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더라면 배우 조진웅이 처음 정부행사에 참여한 것은 내 기억으론 2019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때다. 조진웅은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정부인사들, 유족들 앞에서 시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 을 낭송했다. 이후 2021년에는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오프닝 영상에 출연했는데 그는 김구 선생의 경교장 앞에서 임시정부의 역사를 전달하는 역할...
  5. 총구 앞 '화장' 논란과 4성 장군의 궤변 민주당 안귀령 대변인이 김현태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단장을 고소했다. 혐의 내용에 명예훼손과 함께 ‘성희롱’이 포함됐다. 김 전 단장이 성적 농담이라도 던진 줄 알았다. 내용을 보니 그게 아니다.김 전 단장은 계엄 당일 안 대변인이 계엄군의 총구를 잡고 실랑이를 벌인 장면에 대해 “미리 화장을 하고 연출한 것 아니냐&rdqu...
  6. 민주당 내부조차 반발하는 '내란 재판부'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 '처단'을 위한 '내란 관련 특별 재판부' 설치를 당론으로 채택하려 의원총회를 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국민의힘의 반대가 아니었다. 민주당 의원 3분의 2 이상이 반대했고, 율사 출신 초선 의원들이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며 제동을 걸었다. 심지어 범야권 우군인 민변과 조국혁신당마저 공식...
  7. 개별적으로 털었으니 절도가 아니다? 민주당의 신종 궤변 "돈에는 냄새가 없다."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공중화장실세(稅)를 신설하며 남긴 말이다. 오물 구덩이에서 나왔든 향수 가게에서 나왔든, 국고에 들어오면 그저 교환 가치를 지닌 금속 덩어리일 뿐이라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다.그런데 2025년 대한민국 여의도에서는 이 오래된 격언이 통하지 않는다. 이곳엔 돈에 '색깔'을 입히는 .
  8. 대통령의 '경제학'에 기업은 없는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겠다? "규정을 위반하면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겠다."대한민국 국정 최고 책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실로 섬뜩한 일갈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특정 기업의 '파산'을 통치의 수단이자 목적으로 공공연히 언급했다. 그것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도 아닌, 기업의 규제 환경을 논하는 자...
  9. 전재수 통일교 까르띠에 시계 수령 의혹 '이런 것 받아도 되냐'라며 받아가 민중기 특별검사팀(이하 특검)이 통일교 자금이 더불어민주당 전·현직 의원들에게 유입됐다는 진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내부 문건을 확보하고도 뒤늦게 사건을 경찰에 넘긴 것으로 확인됐다.법조계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특검은 최근 통일교 내부 문건인 '한학자 특별보고'에서 전재수 현 해양수산부 장관(전 의원)이 통일교 행..
  10. '통일교 의혹' 정동영·이종석, 논란 직후 2시간 '비밀 회동' 11일 저녁 호텔 중식당서 만남 포착... '말 맞추기' 의혹 증폭통일교 연루 의혹에 휩싸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이종석 국가정보원장이 의혹 제기 다음 날인 11일 저녁, 서울 도심에서 긴급 회동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매일신문 단독 취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날 오후 6시 서울 중구의 한 호텔 중식당에서 만나 약 2시간 동안 머물렀...
후원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