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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민기 1주기, 한 곡의 노래로 바치는 늦은 추모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8-16 06:08:09
  • 수정 2025-08-16 06:23:27

  • 부디, 이제 이 노래가 광장에서 불리는 일이 없기를

그래픽 : 박주현 지난 7월 21일은 고 김민기님의 1주기였다.

지난 7월 21일은 '아침이슬'을 만든 천재, 김민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뭐가 그리 바빴을까. 달력의 숫자가 무심하게 넘어가는 동안, 나는 그의 기일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다. 뒤늦은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인 이 노래를 다시 꺼내 듣는다. 이것은 늦은 추모이자, 시대의 소음에 잃어버렸던 노래의 맨얼굴을 찾아가는 속죄의 여정이다.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마치 운동권의 상징같은 곡이 되어버려, 되려 언급이나 곡자체의 해석을 피하게되는 아침이슬에 대해 얘기해보려한다. 아니 어쩌면 이 노래를 운동권의 전유물이 아닌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놓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오직 혼자서만 뜬 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밤이 있다.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맞아본 사람이라면 안다.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울컥, 눈물이 솟는 그 순간의 기분을. 양희은의 '아침이슬'은 바로 그 새벽의 노래다. 광장의 노래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고독한 아침을 위한 위로가이다.


잠시 이 노래에 얽힌 모든 역사를 잊고, 헤드폰을 끼고 볼륨을 조금만 높여보자. 그리고 1971년의 스무 살 양희은을, 길고 외로운 밤을 보낸 뒤 이제 막 새벽을 맞은 당신 자신의 곁으로 불러오자.



귀를 간질이는 통기타 소리는 거창한 서곡이 아니다. 마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 "밤새 괜찮았어?"라고 묻는 친구의 나직한 목소리 같다. 곧이어 들려오는 양희은의 목소리는 또 어떤가. 맑고, 가늘고, 힘주어 누르지 않으면 금세 부서질 것 같은 풀잎 끝 이슬처럼 위태롭게 떨린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 끝에 맺힌". 이 노래를 부르는 스무 살의 그녀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 길고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첫 소절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나, 이 힘든 밤을 어떻게든 견뎌냈어"라고 말하는 한 사람의 작고 연약한 생존 신고처럼 들린다.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찌르는 것은 후렴의 시작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희망을 노래해야 할 아침에, 노래는 왜 하필 차가운 묘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말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이 노래가 품고 있는 위대한 진실이다. '아침이슬'은 값싼 긍정이나 맹목적인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밤의 어둠이 끝나도 세상의 슬픔(묘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그 참혹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진정한 용기란,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이토록 잔인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하는 마음에 깃드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는 외침은 이토록 아프고 숭고하다. 이 목소리에는 그 어떤 증오나 분노도 담겨 있지 않다. 함께 가자는 선동도 없다. 오직 '나'라는 주어가, 서러움을 모두 잊는 것이 아니라 애써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노라'고 홀로 다짐할 뿐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그래서 가장 위대한 결심의 순간이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인생의 어느 어두운 아침에 홀로 이불을 걷어차며 "그래도,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내야지"라고 결심했던 바로 그 순간의 마음이다.


3분 14초의 노래가 끝났다. 김민기가 떠난 지 1년, 나는 이 노래를 위한 나의 가장 깊은 추모는 하나의 간절한 기도여야 함을 깨닫는다. 부디,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아침이슬'을 투쟁가로 불러야만 하는 일이 없기를. 더 이상 누군가의 서러움이 광장에 모여 함성이 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기를. 그리하여 이 노래가 마침내 혁명의 무거운 옷을 벗고, 잠 못 이루는 모든 외로운 영혼의 곁을 지키는 새벽의 위로가, 그 본래의 아름다운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헌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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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8-18 20:15:20

    "그렇기에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는 외침은 이토록 아프고 숭고하다. 이 목소리에는 그 어떤 증오나 분노도 담겨 있지 않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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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8-17 13:56:58

    죽일 놈 ㅅㄲ 김털보 읽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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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8-16 11:31:19

    진보연하며 민노총과 함께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던 아침이슬이 이젠 부르기가 껄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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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8-16 07:37:29

    아리고 먹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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