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심을 개인적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의 지난 10여 년 궤적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사람이라면, 이 발언이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그의 정치적 DNA를 드러낸 섬뜩한 고백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한국어판 제목 ‘대망’)를 수년에 걸쳐 읽으며 일본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그의 방에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경탄으로 받아들였을 '교활한 늙은 너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재명이 배운것은 무엇이었을까. 성장기를 인질로 지낸 이에야스에 '소년공' 서사를 가진 본인을 투영시켜 바로 몰입하며 '대망'을 읽었을, 아니 '대망'을 키웠을 이재명 변호사가 눈에 선하다. 함께 추적해보자.
그래픽-가피우스
슬픈가족사
이에야스는 가문 내 권력 분열을 막기 위해, 동맹인 오다 노부나가의 의심을 명분 삼아 정실부인 쓰키야마도노를 살해하고 적장자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했다. 이는 단순한 '슬픈 가족사'가 아니라, 내부 경쟁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냉혹한 숙청이었다. 혈육의 정(情)은 권력 앞에서 완벽히 제거되어야 할 비용에 불과했다.
이재명이 '혜경궁 김씨'논란이 절정으로 치닫을 때 '아내를 사랑하지만 가끔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말하며 본인은 빠져나갈 준비를 시사할 때나, 아들의 불법도박 의혹이 터졌을 때 '아들은 남'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느꼈던 당혹감과 미스터리는 납득이 가게 된다. 가족을 숙청한 이에야스도 있는데, 가족의 정치적 손절이야 뭐가 대수란 말인가. 형님 부부에 대한 패륜적인 조처들도 이제는 쉽게 납득이 간다.
동맹은 소모품
이에야스는 오랜 주군 이마가와 가문을 배신하며 독립했고, 한때 동맹이었던 다케다 신겐을 응징하기 위해 어제의 적이었던 가문들과 손을 잡는 이중 배신도 서슴지 않았다. 이재명에게도 동맹은 영원하지 않았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을 되새기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면종복배(面從腹背) 하며 힘을 키우고, 친문계를 숙청하는 정치기술에는 국민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그 피묻은 손을 언제라도 필요할때면 문 전 대통령에게 내미는 대담함은 두렵기까지 하다. ‘조국 사태’내내 그에게 냉담했으며, 대선에 피해가 갈 듯 하자 선을 긋는 발언을 했으며, 총선 국면에서 조국혁신당이 부상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잡는다. 필요하면 사면도 한다. 경선 때의 경쟁자인 이낙연 전 총리를 제명하자는 수십만 청원에는 입을 닫지만 선거가 불리하게 돌아갈 때는 선대위원장을 억지로 시켜 전국을 돌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재명이고, 이재명이 이에야스다. 의리나 명분보다 상황적 유불리가 선행하는 면에서는 청출어람이다.
내부의 적에겐 더 잔혹하게
이에야스는 미카와 잇코잇키라는 종교 반란 당시, 자신을 배신했던 가신들까지 합세한 내부의 적과 마주했다. 그는 일단 화의를 맺어 상대를 무장 해제시킨 뒤, 약속을 깨고 무자비하게 섬멸했다. 이재명의 ‘비명횡사’가 이와 비슷하다. 그는 ‘시스템 공천’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을 조직적으로 제거했다.
2023년 자신의 체포동의안 가결을 “당내 일부와 검찰이 다 짜고 한 짓”이라 규정하고, 이후 총선에서 그 ‘가결파’들이 당원들의 심판을 받았다며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모습은, 내부 숙청의 책임을 노부나가에게 돌렸던 이에야스도 울고 갈 판이다.
얼굴에 철판깔고 프레임전환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킬 명분이 없자, 호코지 종의 명문 ‘국가안강(國家安康)’이 자신의 이름(家康)을 저주한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재명은 대장동, 백현동 등 자신을 향한 모든 사법 리스크를 ‘검찰 독재 정권의 정치 탄압’이라는 프레임으로 전환했다. 대장동 혐의를 상대인 윤석열 후보에게 '대장동 몸통'이라며 뒤집어씌우는 장면에서는 강골검사 출신인 윤석열도 크게 당황했다. 진실 공방을 정치 투쟁으로 순식간에 바꿔버리는 이 능력이야말로, 400년 전 ‘너구리’에게 책을 통해 배운 기술 아닐까.
이에야스는 100년의 난세를 끝내고 260년의 평화를 열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저지른 배신과 기만, 잔혹한 숙청은 ‘대업’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었다. 이재명도 검찰과 윤석열만 아작내면 그 많은 사법리스크와 험난한 정치투쟁을 덮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그를 상대하려면 국민의힘에 독서열풍이 불어야 할 것 같다. 대체 이재명은 '대망'의 어디에 밑줄을 그었으며, 어느 페이지에 손때가 많이 묻어있고, 접혀 있으며 눈물자국은 어느 대목에 떨어져 있을 지 상상하면서 열심히들 읽어야 할 것 같다.

윤갑희 기자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16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탁월한 분석이네요. 교활한 늙은 너구리.
개꿈에 폭망으로 끝나리라 믿습니다. 덕분에 말로만 들었던 대망의 이야기를 알게됐어요. 독서 열심히 해서 이 정부의 폭망에 기여하겠습니다.
본성적으로 그런인물에 끌리는...
저런 놈이 사법부를 장악했으니...
가끔은 솔직해요
국힘 의원들은 제발 연구해랏!!
맞당께유
그래도 도쿠가와가 억울할 듯.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가족이던 동지던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죽여 버리는 인간. 저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다.
오호.. 진심!!
모처럼 진심이었군여
늙고 교활한 뱀인데 무능려해서 나라 말아먹네
두번은 보고 싶지 않은 정치인이에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형님 가족 괴롭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는데 진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