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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당신의 상처는 고름인가, 방패인가?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9-27 01:04:55

  • 부서진 것들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남자의 이야기, 『포기할까 했는데 아직 3라운드』

좋은 물건에는 이야기가 깃든다. 오래된 가죽 가방의 흠집은 주인의 여정을, 낡은 만년필의 마모된 펜촉은 그가 써 내려간 고뇌의 시간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몸은 어떨까. 프로레슬러 김남훈의 몸은, 그가 온몸으로 살아낸 시간을 기록한 한 권의 묵직한 파피루스 같다. 그리고 그가 쓴 『포기할까 했는데 아직 3라운드』는, 흠집과 상처로 가득한 그 몸의 사용법을 우리에게 슬쩍 보여주는, 다정하고도 능청스러운 해설서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처방전을 받아 드는 경험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먼지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오래된 작업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경험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이가 조금만 나가도 그릇을 내다 버린다. 깨진 조각은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흠집은 실패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자기가 귀했던 일본에는 ‘킨츠기(金継ぎ)’라는 독특한 미학이 있다. 깨진 도자기의 파편을 옻으로 이어 붙이고, 그 틈을 금가루로 메워 마무리하는 복원 기술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물이다. 킨츠기를 거친 그릇은 깨지기 전보다 오히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금빛으로 빛나는 선명한 균열의 흔적은 더 이상 흠이 아니라, 그 그릇만이 품은 고유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풍부한 도예 기술을 넘어, 세대를 이어온 물건의 추억과 상처의 역사를 존중하는 태도다. 그리고 이 책을 읽다 보면, 김남훈이라는 사내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킨츠기 그릇처럼 느껴진다.


그래픽 : 박주현 우리나라 도자기는 깨지기는 커녕 이만 나가도 내다 버리지만, 자기가 귀했던 일본은 다르다.

그가 상처를 다루는 방식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차라리 스탈린그라드에서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들의 생존술을 닮았다. 책 속에서 그는 9만 명의 포로 중 일부가 11,491km를 걸어 탈출했던 기적 같은 실화를 들려준다. 그들의 비결은 거대한 절망을 잘게 쪼개는 것이었다. 주머니에 넣은 열 개의 돌멩이. 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돌멩이 하나를 다른 쪽 주머니로 옮기는 단순한 행위의 반복. 그들은 그렇게 광활한 시베리아의 절망을 ‘하루치’의 걸음으로 바꾸어 살아남았다. 김남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60세까지 현역으로 뛰겠다는 무모한 선언의 무게를 ‘오늘 하루의 훈련’으로 감당하고, 링 위에서 겪는 공포를 ‘이번 한 라운드’의 버티기로 이겨낸다. 거대한 상처를 통째로 끌어안고 절망하는 대신, 그것을 오늘의 땀방울로 잘게 부수어내는 것. 이것이 그가 터득한, 영혼에 킨츠기를 시술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그가 말한 상처를 방패로 만드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것일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어지러운 책상을 정돈하고, 아이의 운동화 끈을 다시 묶어주는 일.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는 거창한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작은 우주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하는 최소한의 중력이다. 이 작은 행위들이 없다면, 우리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흩어져 버릴 테니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우주를 지켜내는 힘은, 타인의 우주를 알아보는 섬세한 시선으로 이어진다. 그는 문 닫기 직전의 동네 통닭집 사장에게서 기계처럼 정직하게 반복되는 노동의 성실함을 읽어낸다. 기름에 데인 그의 팔에 새겨진 화상의 켈로이드 흉터, 그 생존의 증표를 그는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 날, 선뜻 5만 원과 자신이 읽던 책 한 권을 건넨다. 이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다. 뜨거운 기름 앞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온 한 전문가에 대한, 또 다른 전문가의 경의의 표시다. 한 끼의 따뜻한 음식이 한 사람의 고된 하루를 어떻게 위로하는지 아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은 이해. 그것 역시 상처가 빚어낸, 단단한 방패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특히 ‘길거리 싸움에서 100% 이기는 법’에 이르면 우리는 무릎을 치게 된다. 20년간 링 위에서 철제 의자로 머리를 맞고 각목으로 등을 구타당했던 남자가 알려주는 필승의 비기는, 놀랍게도 ‘36계 줄행랑’과 ‘스마트폰 문자질’이다. 시비가 붙은 순간, 태연히 스마트폰을 꺼내 “이제 거의 다 왔어”라고 문자를 보내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위대한 승리’다. 이 대목에서 실소가 터지지만, 그 웃음 끝에는 어쩐지 마음이 단단해지는 지혜가 남는다. 그는 이기는 법이 아니라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순간의 자존심보다 자신의 삶이라는 더 큰 것을 지켜내는 것. 링 위에서는 누구보다 용맹했던 슬러거가 링 아래에서는 가장 현명한 아웃복서가 되는 이 아이러니야말로, 그가 상처를 통해 얻은 가장 빛나는 금빛 무늬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깨지기 쉬운 존재들이다. 세상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예고 없이 날아온 펀치에 비틀거린다.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깨어진 부분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애쓴다. 하지만 김남훈이라는 이 유쾌한 장인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깨진 그 자리를 부끄러워 말고,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그 결을 따라 당신만의 이야기를 채워 넣으라고. 그렇게 금을 입힌 상처는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말이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희망이란, 세상이 결국 좋아질 것이라는 안일한 낙관이 아니다. 세상이 좋든 나쁘든 나의 행위가 의미 있다는 덤덤한 각오에 가깝다. 태양을 기다리는 대신, 제 손으로 작은 촛불 하나를 켜는 행위에 가깝다. 그 작은 불빛이 세상을 대낮처럼 밝힐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발밑을 비추고, 옆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우리가 함께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엔 충분하다고. 책은 그렇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듯하다.


사진 : 세상은 어쩌면 성공보다는 포기와 좌절이 기본값은 아닌가 의심스러울때가 많다. 그때 스스로 외쳐보자 '아직 3라운드'책장을 덮고 나면, 어쩐지 내 몸의 오래된 흉터 자국을 가만히 만져보게 된다. 잊고 싶었던 실패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다. 마치 잘 벼려진 방패의 단단한 표면을 쓸어보는 기분이다. 아직 3라운드. 그래,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방패가 아닌가. 나도 모르게 빙긋, 입가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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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9-27 14:12:23

    주문한 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너무도 멋진 이 책은 또 하나의 우리들의 공감과 소통입니다. 작가님과 우리 모두의 킨츠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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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ongong2025-09-27 14:11:10

    리뷰 감사합니다.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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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9-27 12:55:15

    꼭 읽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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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9-27 10:43:22

    이재명과 개딸 부류들과 오래 접촉하다 보니 그 사나움과 거친 심성에 넌덜머리가 납니다
    김남훈 프로님을 매일 방송으로 뵈면 고운 심성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늘 노력하고 공부하는 모습에 제 자신 반성과 성찰을 하곤 하죠
    정말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의 모범이 되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교과서로 써도 무방할 정도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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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squf242025-09-27 09:20:35

    리뷰 읽기 전에 아름답다는 말이 먼저 다가서는 분들
    귀하신 분들의 건승을 발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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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9-27 07:59:41

    읽다보니 코끝이 찡해지고, 책을 읽고 싶게 만드든 리뷰네요. 당장 책을 구매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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