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의 링은 고독한 섬이다. 로프는 섬의 해안선이고, 관객의 함성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같다. 조명이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처럼 쏟아지면, 세상에는 오직 나와 상대, 그리고 거친 숨소리만이 남는다. 수세에 몰릴 때가 있다. 상대의 주먹은 비처럼 쏟아지고, 발차기는 도끼처럼 날아든다.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 정신의 방어선마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이제는 포기할 시간이라고 뇌까리는 또 다른 내가 속삭인다. 바로 그 절망의 순간, 기적처럼 한 번의 접촉이 일어난다.

‘톡.’
그것은 묵직한 강타가 아니다.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는 화려한 기술은 더더욱 아니다. 스치듯 지나간 잽이었을 수도, 상대의 가드에 막혔으나 아주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간 스트레이트였을 수도 있다. 해설위원의 눈에도, 바로 앞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심판의 눈에도 포착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링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 공격을 날린 자신과 그것을 감지한 상대는 알고 있다. 방금, 아주 얇지만 날카로운 바늘 하나가 상대의 촘촘한 방공망을 뚫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나는 그것을 ‘한 대 톡’이라 부른다.
통각 세포를 타고 흐릿하게 전달된 이 신호는 단순한 물리적 감각 이상이다. 그것은 가능성의 신호이며,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의 전언이다. 수백 번의 헛스윙 끝에 마침내 연결된 단 한 번의 접속.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발견한 바늘구멍만 한 빛과 같다. 그 빛을 향해 남은 모든 것을 쏟아부을 용기가 생긴다. 판정승이나 KO패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내 의지가 상대에게 닿았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쉰한 해를 살아오며 깨닫는 것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링 위에서도 이 ‘한 대 톡’의 법칙은 변함없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은 새로운 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는 것과 같다.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막막함이 땀을 가득 먹은 글러브처럼 어깨를 짓누른다. 거대하고 막연한 하루라는 상대를 마주하면 어디부터 공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첫 번째 유효타, 하루의 시작을 여는 ‘한 대 톡’이다.
미 해군 제독이었던 윌리엄 맥레이븐은 그의 저서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당신의 침대부터 정리하라(If you want to change the world, start off by making your bed)’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한 대 톡’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이불을 각 잡아 개는 행위. 그것은 밤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하루의 질서를 세우는 나만의 작은 선언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 자신은 알고 있다. 오늘 하루의 첫 번째 과업을 완수했다는 것을. 방금 나의 의지가 하루라는 거대한 상대에게 첫 번째 타격을 가했다는 것을.
그것은 무엇이든 좋다. 영어 단어 다섯 개를 소리 내어 외우는 것도 훌륭한 잽이다. 뻐걱이는 몸을 일으켜 5분간 스트레칭을 하는 것은 상대의 중심을 흔드는 로우킥이 될 수 있다. 책상에 앉아 책의 첫 문단을 필사하는 것은 날카로운 탐색전이다. 이 작고 사소한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미약해 보이지만, 꾸준히 쌓여 하루의 공기를 바꾼다. 시작부터 무기력에 잠식당한 하루와, 작은 성공의 감각으로 시작한 하루는 그 결이 다르다.
우리는 종종 거대한 목표에 압도되어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 10라운드 경기를 앞두고 1라운드의 탐색전은 잊은 채 마지막 라운드의 KO펀치만을 생각하는 아마추어와 같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여정은 아주 작은 발걸음의 중첩으로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하고, 오직 나 자신만이 인지하는 그 미세한 성취의 감각. 그 ‘한 대 톡’의 기억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한번 주먹을 쥐게 만든다.
오늘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갠다. 링 위에 오르기 전 바셀린을 바르듯,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미 오늘이라는 거대한 상대의 빈틈에, 나만이 아는 깨끗한 유효타를 한 대 날렸다. 이제 남은 라운드를 싸워나갈 최소한의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한 대 톡.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위대한 승리의 감각이다.
[팩트파인더=김남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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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미약하지만 원고료 보냅니다.
큰 예비동작으로 힘을 잔뜩 넣은 주먹은 상대방에게 쉽게 읽혀 쉽게 피해 버리고 본인 힘만 빠진다고 알고 있는데 제대로 먹히는 주먹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김남훈 선수의 말씀처럼 '한 대 톡'으로 깔끔하게 요약 되는군요. 한 대 톡을 피한 선수는 귀에 바람소리 지나가며 서늘해진다던데 주먹 1도 못 쓰지만 그 느낌 RGRG! 묘사가 생생해서 더 알 것 같은 이 느낌ㅎㅎ 이 맘으로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신다니 멋집니다!! 이써보여~요~~
일상과 나이와 정치뉴스에 지쳐있는 나에게 훈프로의 글은 '한 대 톡'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남훈님은 소설가가 되셨어야 할 분. 촘촘한 묘사와 감각적인
문장, 거기에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시각까지. 글이 너무 좋습니다.
설겆이가 쌓였는데 허기 싫을 때 일단 찻물을 올리고 다관애 찻잎 넣고 설겆이 시작. 물이 끓으면 스위치가 꺼지고 한 김 나갈 땨까지 설겆이 계속. 물 온도가 맞게더 싶을 땨 물을 따라넣고 우러나는 동안 설겆이 마무리.
처음에는 내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나를 만든다는 말처럼
습관은 내 미래를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미세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큰 것을 이룰 수 있는
모든 표현을 압축해낸 “한 대 톡”에 경의를 표합니다.
늘 도전하는 삶 부럽고 닮고 싶어요
저도 요즘은 예전보단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산다는 ㅋ
대한민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시민을 뽑으라면 훈프로님을 추천하겠음
나는 과연 하루하루를 이 분처럼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늘 반성함
버틸 힘을 주시네요
포기할까 했는데 아직 3라운드!!!!
한 대 톡!
김남훈 프로래슬러, 편집장님은
글도 삶도 어쩜 이렇게 빈틈없고 반듯하실까요.
한대 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