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거대한 전환점들로 점철되어 있다. 농업혁명이 수렵 시대를 끝냈고, 산업혁명은 농경 사회를 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산업 문명의 긴 황혼을 지나 ‘디지털 문명’의 여명을 목격하고 있다. 내년이면 독립 250주년을 맞는 미국, 이 거대한 전환의 설계도를 손에 쥐고 다음 천 년의 규칙을 코딩하는 자들이 바로 ‘미국 2.0’의 설계자들이다.
그래픽 : 트럼프와 그를 보좌하는 페이팔 마피아가 새로 써내려가는 미국 2.0
이 변화를 트럼프 개인의 변덕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실리콘밸리의 설계자들이 트럼프라는 완벽한 ‘파괴자’에게 이식한 거대한 청사진이다. 트럼프의 뒤를 바치는 피터 틸과 ‘페이팔 마피아’는 단순히 돈만 많은 사업가가 아니다. 철학적 기반은 피터 틸이 제공하고, 일론 머스크는 우주와 통신, 여론 광장을 장악하며, 알렉스 카프는 인간의 법을 기계의 코드로 대체할 통치 기술을 완성하는 식이다. 이들의 성공을 담보하는 가장 압도적인 무기는 바로 인공지능(AI)이다. 범용인공지능(AGI)에 가장 근접한 조직들은 예외 없이 미국 땅에 있으며, 이들이 주도하는 기술적 특이점은 다른 국가들이 수십 년간 따라잡을 수 없는 지적, 경제적, 군사적 해자(垓子)를 구축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왜 ‘산업국가 마인드’라는 낡은 감옥에서 탈출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산업국가 마인드란, 무역 흑자나 제조업 점유율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총합을 국력이라 믿는 제로섬 게임의 세계관이다. 이 땅의 주류 정치세력이 보이는 반미, 반일 등의 감정에 기반한 외교 노선은 이러한 산업 시대의 유물이다. 과거의 상처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니, 눈앞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전환이 보일 리 없다. 저들이 데이터와 AI 연산 능력으로 새로운 기축 통화를 만들 때, 우리는 법 조항을 흔들며 우리끼리 싸운다. 이것은 마치 나무 펜스로 쓰나미를 막으려는 것처럼 처절하고 어리석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압도적인 소프트웨어를 실행할 가장 강력한 하드웨어를, 바로 여기 한반도에 조용히, 그리고 단단히 박아 넣고 있다.
그들의 지도에는 오직 하나의 대원칙만이 선명하게 빛날 뿐이다. 21세기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륙과 해양을 잇는 이 교두보(橋頭堡)를 결코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미국의 국익과 정확히 상통하는 단 하나의 지점이다. 한반도는 그들에게 대륙을 향한 비수이자 태평양을 지키는 방패다. 친구도, 적도 아닌 오직 ‘전략 자산’으로서의 가치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섬뜩한 기시감과 마주한다. 미국의 전략가들이 한반도를 이념이 아닌 좌표로 계산하며 천 년의 제국을 설계하는 동안, 서울의 여의도에서는 아직도 ‘친미냐 반미냐’, ‘친중이냐 반중이냐’는 철 지난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다. 이 장면, 꼭 120여 년 전 열강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놓고 제멋대로 선을 긋던 구한말의 풍경과 소름 돋도록 닮아있다. 그때의 조정 대신들이 청나라에 붙을지, 러시아를 끌어들일지, 일본과 손잡을지를 놓고 갑론을박하며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나라의 주권은 소리 없이 증발했다. 열강의 이름이 미국과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지도를 보는 자들 앞에서 달력만 찢어내며 우리끼리 싸우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표면적인 외교 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치닫는 이 기묘한 시점에, 미국의 실제 행동은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모든 계산의 가장 무서운 증거다. 워싱턴의 의회는 대통령 개인의 변덕으로 동아시아의 체스판 자체를 뒤엎을 수 없도록 국방수권법이라는 이름의 안전장치를 걸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미 국방부가 발표한 ‘투어 정상화’라는 지극히 행정적인 용어 뒤에 이 거대한 포석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이는 단순한 군사 정책의 변경이 아니다. 이미 미국의 웬만한 소도시를 방불케 하는 학교, 병원, 주택단지가 들어선 그곳에, 이제는 사람들의 삶 자체를 뿌리내리게 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제 군인들의 자녀들은 이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들의 가족은 일시적인 방문객이 아닌, 이 땅의 장기적인 거주자가 된다. 이 발표는 평택을 동북아시아의 심장부에 건설하는 미국의 영구적인 ‘성채 도시(Citadel City)’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의 공식적인 착수 신호다. 물리적인 철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인간 앵커(Human Anchor)’를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평택 캠프 험프리스 주한미군 기지. 미군과 가족 포함 4만1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합뉴스자, 이제 우리의 달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30년 뒤, 이 땅의 생산가능인구가 절반으로 증발하고 ‘국가 소멸’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되리라는 경고는 이제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지경이다.
결국 질문은 ‘친미’냐 ‘반미’냐가 될 수 없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다가오는 디지털 문명이라는 새로운 운영체제에 접속해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 시대의 구형 기기로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인가?” 천년은커녕, 30년 아니 단 10년, 5년이라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의 정치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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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AI 시대에 부흥하지는 못할 망정 이미 성숙한 산업들마저 온갖 규제와 친노동계로 망가뜨리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본 미국,
정신없이 어수선한 시대의 변환점이
세계 열강의 각축에서도 비롯,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선 전 이낙연 고문님이 말씀하셨지요.
국내외적으로 굉장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고,
이 시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고요.
"꼭 120여 년 전 열강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놓고 제멋대로 선을 긋던
구한말의 풍경과 소름 돋도록 닮아있다."
참으로 어려운 시국에 이재명이라니,. 슬픕니다
이재명과 윤석열이 대권주자로 주목을 받고 있을 때 백악관 쪽에서는 2050년 쯤에는 한국은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될 거라는 예견을 내 놓았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면에서 이 기사와 같은 맥락이란 생각이 듭니다. 머리카락이 쭈뻣해지네요.
아파트값 얘기에만 관심 있으니...
각자도생의 시대 무능하고 사악한 집단을 선택한 국민 수준이...지지율 나오는거 보면 한숨만 나온다
저도 동감합니다. 구한말과 너무 비슷한 상황이라는 걸. 이 중요한 시기 윤석열. 이재명 같은 ㄷㅅ을 뽑는 국민 수준이 너무 참담합니다. 정치를 진영 속에서만 생각해 상대를 죽여버려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도. 이재명 지지자들이 4050이라는게 제일 답답한 싱황입니다. 어쩡장하게 베워 부모 세대를 무식하다하고 젊은 세대를 아무것도 모른다 치부해 버리는
저도 지금이 구한말과 비슷하고 앞으로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것만 같아요
그런데 지도자가 이재명이라는 너무 암담한 현실이 …
외교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살아남겠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섭고 섬뜩하네요. 자기 범죄 지우려는 대텅과 그자의 졸개들이 망치고 있는 나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엄청난 통찰력입니다. 저도 요새 구한말의 기시감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네요
그 혜안의 정치가 실종되었다는 것이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