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 (사진=연합뉴스)
논란이 된 대한민국 '간첩법', 영국 스캔들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최근 여의도 정가에서 '친중'과 '반중' 전선이 격돌하며 현행 간첩법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현행법상 '적국' 규정이 북한에 한정돼, 중국 등 제3국을 위한 간첩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거세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영국 역시 2023년 간첩법(National Security Act)을 개정해 대상을 모든 국가로 확대했지만, 바로 그 법 개정 직전(2021-2023년)에 벌어진 '중국 스파이' 사건 처리를 두고 영국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재판 직전 기소 취소
영국 정계를 겨눴던 '중국 스파이' 사건은 극적인 순간, 돌연 막을 내렸다. 재판 시작 불과 몇 주 전, 영국 검찰이 전직 의회 연구원 크리스토퍼 캐시(Christopher Cash)와 교사 크리스토퍼 배리(Christopher Berry)에 대한 모든 기소를 전격 취소한 것이다. '증거 불충분'이라는 석연찮은 이유는 정가에 즉각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권력의 심장부를 겨눈 혐의
사건의 혐의는 영국 권력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었다. 캐시는 의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반중 정치인 톰 투겐하트(Tom Tugendhat) 보안부 장관과 보수당 알리시아 컨스(Alicia Kearns) 외교 위원장 등 핵심 의원실의 기밀 정보를 수집했다. 이 정보는 배리를 거쳐 '알렉스'라는 코드명의 중국 국가안전부(MSS) 요원에게 전달됐으며, 그 최종 보고서는 시진핑 주석의 오른팔인 카이치(Cai Qi, 채치) 상무위원의 책상에 오른 것으로 지목됐다.
수사 당국이 확보한 증거는 치명적이었다. 영국 내 장관직을 건 정치적 밀약 내용, 영국과 대만 국방부의 비밀 회동 같은 민감한 정보들이 공유된 정황이 포착됐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지속된 이 메시지들은 당시 외부무 장관이 중국 신장지구에 대한 경제 제재가 효과를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내용부터, 중국의 대만 침공 관련 대응 전략 등 다양했다.
100년 묵은 '1911년 법'이라는 방패
하지만 이 모든 증거는 100년 묵은 1911년의 낡은 간첩법(Official Secrets Act) 앞에 무력화됐다. 영국 검찰청은 기소 유지를 위해선 정부가 중국을 '위협 국가'로 공식 규정했어야 했다고 해명했다. 수개월간 이 지정을 요청했지만, (당시 보수당) 정부가 끝내 거부했다는 것이다. 명백한 증거가 낡은 법률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키어 스타머 총리실은 '극도로 실망스럽다'고 즉각 논평하며, 책임을 전임 보수당 정권으로 돌렸다. 캐시와 베리의 간첩 행위가 보수당 정권 시절에 일어난 일이고, 당시 보수당은 중국을 '위협 국가'로 지정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또한 2023년 개정된 간첩법을 소급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도 들었다. 책임 공방은 거대한 정치 게임으로 확대되고 있다.
스파이 활동의 표적이 됐던 의원들의 분노는 끓어올랐다. 캐시를 직접 고용했던 컨스 의원은 이번 결정을 맹비난했다. 그는 "대테러 경찰과 정보기관으로부터 증거가 압도적이라고 들었다"고 폭로하며, 검찰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칼 뽑아 든 의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제 스티븐 파킨슨 검찰총장에게 향하고 있다. 여야는 칼을 뽑아 들었고, 외무·내무·법무 위원회의 합동 조사가 예고됐다. '누가, 왜, 재판을 중단시켰는가?'에 대한 진실 규명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불기소 처분을 받은 캐시는 "악몽이었다"며 "결백을 증명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고 항변했고, 배리 역시 자신은 스파이가 아닌 '기업 컨설턴트'였다고 주장했다.
베이징-런던 8,200km, 베이징-서울 900km
중국 베이징에서 영국 런던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8,200km이다. 베이징에서 서울까지는 불과 900km이다. 영국의 소동이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이다.
김경모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