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드라마 얘기를 가장한 정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드라마는 시대의 거울이다. 시청자들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화면에 투영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히트한 드라마들은 시대가 원하던 것을 정확히 반영했다.
드라마, 시대의 자화상
나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가수를 위한 노래도 만들지만, 영화나 드라마에 음악을 붙이는 일이다. 그렇다고 미디어 전문가는 아니다. 가수와 감독이 만족하는 음악을 만드는 것, 그게 내 코앞의 목표고 일의 전부다. 하지만 굳이 전문가가 아니어도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마치 길을 지나던 행인도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것처럼.
김수현 작가는 1972년 일일드라마 '새엄마'를 통해 계모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이끌어냈다. 드라마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연설보다 막강하다. 일반 시청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구속되기 전 '모래시계'가 방영됐다. 마치 우물을 찾던 방랑자들처럼 그 드라마에 국민들은 사로잡혔다. IMF 몇 년 전'서울의 달'은 노력 없이 얻으려는 부의 욕망에 침을 뱉었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약간은 가벼운 방식으로 접근했지만 동성애를 바라보는 편견에 경고를 보냈다. 드라마는 사회가 말하기 꺼려하는 것들을 미리, 대신 말했다.
우리는 왜 드라마에 몰입할까. 아마도 그것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현실에서 고민하던 것들을 드라마에서 찾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안도하는 것이다.
선을 지키는 마음
벌써 글로벌 히트 드라마의 원류처럼 회자되는 '도깨비'에서는 죽어가는 선왕이 이복 왕세자에게 전할 말을 대신 공유에게 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 전하거라." 묘한 울림이 있는 문장이다. 하지 않음의 미학이라고 할까.
관계에는 선이 있다. 뼈에 사무치게 좋아도, 숨도 섞기 싫을 만큼 싫어도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선을 넘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관계의 기본 법칙이다. 마치 우주의 모든 천체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치에 관한 한 꽤 오래전부터 그 선이 무너진 듯하다. 추미애의 라쿠카라차 타령, 민주당 지지자들의 조희대 대법관 탄핵 주장, 전장연의 주장에 동의 여부와는 관계없는 이준석식 모욕 등등. 예전 같으면 분노했을 일들이 이제는 무감각해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한 대 세게 맞은 후 느끼는 둔한 감각과도 같다. 내려놓은 걸까, 아니면 그저 지친 걸까.
드라마가 말하는 것
가장 최근 국민 드라마 반열에 근접했다 할만한 '폭싹 속았수다'를 보자. 강말금배우가 연기한 여관 주인도, 나중에 이해 가능한 캐릭터로 변화한 학씨도 아닌, '말하지 못하면 죽는 병'을 가진 고 강명주 배우가 연기한 예비 시어머니 역만 끝까지 악역으로 남았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유독 그 인물만이 최소한의 선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것.
진정한 시원함의 의미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흥미롭다.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날 선 조롱과 비아냥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탄산기가 빠진 진중하고 따뜻한 이낙연의 연설에 사람들이 반응하고 감동한다. 영리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시끄러운 소음 뒤에는 잠깐의 시원함과 함께 텁텁하고 씁쓸한 공허함만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한순간의 통쾌함보다 지속 가능한 관계를 원한다.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이 화려하고 과장된 수사보다 오래 기억되는 것처럼. 담백하고 깔끔하지만 일차원적이지 않은 깊은 울림에 우리는 목말랐는 지도 모른다.
2025년 대한민국. 드라마는 여전히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다만 그 거울이 보여주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할 뿐.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정치권은 언제쯤 선을 지키는 '하지 않음의 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역사드라마가 시대별로 특징과 변화를 겪었듯이, 우리의 정치 문화도 발전해야 한다. 농촌이 드라마에서 실종되었듯이, 우리 사회에서 품격과 절제의 미덕도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사회도 날카로움 대신 깊이 있는 담론으로 나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