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2026. 6. 16.

탈모 VS 희귀병, 누구를 위한 건강보험인가

건보 재정 위기에 연 3천억 탈모 치료 지원한다는 정부

넓고, 얇게 보장하는 한국의 건강보험, 중증질환 보장은 아직 미비하다

약값과 치료비 때문에 가정이 붕괴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탈모 보장이 왠말

세계적으로 우수한 한국의 건강보험, 그러나 중증질환 보장은? 

한국의 건강보험 제도는 감기 같은 가벼운 질환이나 일상적인 병원 이용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접근성과 저렴한 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의 건보 제도를 ‘가성비’ '효율성' 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하지만 목숨을 위협하는 '중증·희귀 질환' 영역으로 들어가면 보장률이 턱없이 낮아지는 고질적인 사각지대를 가지고 있다. 


건보 재정의 적자 문제 또한 외면할 수 없다.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인해 지출은 증가하는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해 재정을 댈 사람이 없는 상황은 전 지구적인 문제다. 정부가 탈모 치료 급여화를 추진하는 와중에 의료계와 시민단체들이 “뭣이 중한디”, “시급한 중증 질환부터 챙겨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재정 고갈의 와중에도 과거 문재인케어(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 시절 4대 중증질환 보장에 재정투입이 이루어져 어느정도 성과를 냈지만 문재인케어 또한 명확한 한계가 있는 정책이었다. 정책이 '국민체감도' 위주로 설계, 시행되다 보니 대중적인 검사(MRI, 초음파)와 병실료 등 '눈에 잘 보이는' 비급여의 급여화를 우선했고 대학병원 쏠림 현상이 심화됐으며 여성질환 보장 확대에는 미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 논란을 일으킨 '탈모 치료 건보 지원' 정책도 '정책 효과의 가시성' 을 중시하는 문재인케어로부터 파생된 포퓰리즘적 부작용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탈모치료. (사진: 연합뉴스)
탈모치료. (사진: 연합뉴스)

메디컬 푸어로 내몰리는 암환자들 

4기 암 및 전이암 환자의 '신약 항암제’ 보장은 환자들에게 가장 절박한 사안이지만 치명적인 빈틈이 존재한다. 기존 항암제에 내성이 생겼거나 암이 온몸으로 전이된 4기 암 환자들은 생명 연장을 위해 표적항암제나 면역항암제 같은 차세대 신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신약은 건강보험 급여 승인을 받기까지 보통 수년이 걸리며, 승인을 받지 못한 '비급여' 상태에서는 한 달 약값만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 단위를 넘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유방암, 폐암, 대장암 등 비교적 흔한 암에 걸린 환자들도 최신 약제를 쓰려면 연간 수천만 원의 비용을 환자 개인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병원비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치료비를 감당 못해 퇴원을 선택하는 환자가 옛날 신파 드라마 속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눈물로 치료를 포기하는 '메디컬 푸어(Medical Poor)' 의 비극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돈 때문에 좋은 약을 못 쓰는 비극은 2026년에도... 

메디컬 푸어가 증가하는 현실은 최신 조사로도 증명되고 있다. 대한종양내과학회 보험정책위원회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암 환자 270명(진행성·전이성 암 환자 56%, 항암치료 60%)과 암이 없는 일반인 271명 등 총 54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환자 본인부담률 상향에 대한 수용도 및 지불의사 파일럿 연구' 결과, 설문에 응답한 암 환자 중 절반에 가까운 49%는 최근 3년 이내 의료진으로부터 효과가 우수한 비급여 항암제를 권유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25%는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기존 치료를 선택했다고 응답했다. 암환자가 단지 돈 때문에 더 효과좋은 치료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다. 


돈 때문에 신약 치료를 포기하거나 희귀병 치료를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사례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이미지: AI 생성, 연합뉴스)
돈 때문에 신약 치료를 포기하거나 희귀병 치료를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사례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이미지: AI 생성, 연합뉴스)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해외로 떠나고 청원에 매달리는 부모들 

수요가 적다는 이유로 제약사들이 약값을 높게 책정하는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 또한 건강보험 재정 심사의 문턱을 넘기 어렵다. 척수성 근위축증(SMA), 신경섬유종증, 영아 유전 질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흔히 '원샷 치료제'로 불리는 유전자 치료제나 희귀 질환 신약들은 약값만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인 경우도 있다. 2009년 산정특례 제도가 도입된 이후 정부가 일부 약제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매년 확대하고는 있으나, 신약 심사 기간은 여전히 길고 조건이 지극히 까다로운 실정이다. 생명이 위급한 희귀병 아이들을 둔 부모들이 해외 원정 치료를 고민하거나 국민동의청원에 매달리는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다.


중환자 간병에 가정이 무너지는 잔인한 현실 

중증 환자의 생존과 직결된 '인공호흡기 및 보조장치' 분야의 건보 보장도 과제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루게릭병)이나 중증 뇌병변 환자들은 스스로 숨을 쉬거나 음식을 섭취하기 어려워 의료기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데 가정용 인공호흡기 대여료나 소모품비, 특수 영양식(경관유식) 비용 등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필수 의료 소모품 중 상당수가 건강보험 지원 범위 밖이거나 본인 부담률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단순 치료비 외에도 24시간 간병에 따르는 비용은 건강보험이 거의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비용을 견디다 못해 가족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에 매달리면 소득이 끊기고, 높은 치료·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고착 되어 더 큰 곤란을 겪는 사례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심뇌혈관 질환 후유증 및 중증 재활 치료의 공백도 뼈아프다. 뇌졸중(뇌경색·뇌출혈)이나 심근경색은 골든타임 내 수술을 받으면 생명을 건질 수 있지만, 이후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중증 장애와 후유증을 남길 확률이 높은 무서운 질환이다. 우리 건보 제도는 급성기 수술 비용은 잘 보장하는 편이지만, 일상 복귀를 위한 '중증 재활 치료'는 건강보험이 인정하는 입원 기간과 치료 횟수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몇 달 주기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바꿔가며 전전하는 '재활 난민’으로 내몰리고 있다. 


중증 여성 질환, 응급피임약보다 탈모가 중요한가?  

특히, 여성 질환과 재생산권 분야에 방치된 보장 사각지대를 떠올리면 탈모 급여화의 무논리와 불공정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유방암 환자의 유방재건술은 선별급여가 도입되었으나 여전히 환자가 본인부담률 50%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며, 자궁암이나 자궁근종 수술 시 가임력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로봇 수술과 최신 표적항암제들은 여전히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급여 영역에 묶여 있다. 경구피임약이나 응급피임약은 청년의 재생산권이라는 헌법적 가치와 맞닿아 있음에도 전액 본인 부담인 비급여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여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암 후속 치료와 필수 의료 영역조차 재정 부족을 이유로 외면하는 정부가, 생명과 무관한 탈모 치료에 연간 수천억 원을 쓰겠다고 공론화에 나서다니, 과연 이것이 민생이고 복지일까? 무리한 정책 추진은 아슬아슬하게 봉인, 억제되어 있는 성별, 세대별 갈등을 다시 불어일으킬 것이다. 때문에, 이번 정부의 탈모 치료 건보 적용 추진은 '사회적 갈등을 감수하더라도 청와대와 여당이 원하는 표심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무책임한 정치적 셈법의 결과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게 한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사진: 연합뉴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사진: 연합뉴스)

불평등과 갈등은 둘째 치고, 재정이 바닥이다 

건강보험 재정 고갈 문제는 현재 보건의료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마주한 현실이다. 건보 재정은 몇 년간 코로나19 시기 의료 이용 감소 등으로 인해 반짝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2026년 올해를 기점으로 당기수지 적자로 전환된다는 전망이 공식화된 상황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역시 올해 상반기 브리핑을 통해 적게는 수천억 원에서 많게는 2조 원이 넘는 당기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돈을 풀고 싶어도 재정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정부는 탈모 치료에 연간 최소 1,000억 원에서 최대 3,000억 원 안팎의 건보 재정이 투입될 것이라는 실무 추계를 마쳤다고 밝혔다. “뭣이 중한디”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엄중한 재정 위기와 중증 환자들의 고통 속에서, '탈모 치료'에 수천억 원의 건보 재정을 추가로 투입하겠다는 정부. 도대체 무엇이 중한지 모르는 정부의 정책 방향은 생명이 경각에 달린 중증 환자와 그 가족들의 눈에 과연 어떻게 보일까. 이 혼란 속에서 국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한다. 국가는, 적어도 이 체제가 국가라면, 표심을 사기 위한 선심성 급여화를 궁리하기 전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부터 새겨야 할 것이다. 



탈모 VS 희귀병, 누구를 위한 건강보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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